부활절 행사에 ‘부활’은 있는가-교리라는 박제 속에 갇힌 예수, 내 삶으로 증명해야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죽음 위로 덮쳐오는 '사건'이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처절한 자기 부인 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취하려 든다.
해마다 봄이 오면 한국 교회는 부활의 환희로 들썩인다. 어김없이 전국 곳곳에서 성대한 연합 예배가 열리고, 십자가를 앞세운 시가행진은 도심 한복판에서 기독교의 존재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부활절 예배에 대통령까지 축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유력 정치인들이 참석한다. 외형상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축제’이다. 그러나 화려한 꽃과 웅장한 찬양, 정제된 기념사들이 가득한 그 자리에 정작 ‘생생하게 살아있는 부활 신앙’이 있는지는 뼈아프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신앙'과 '부활 교리'를 혼동하고 있다. 대통령이 부활절 행사에 참석해 부활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를 부활 신앙의 소유자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정치적 수사나 종교적 예우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현상이 비단 정치권뿐만 아니라 강단 위의 목회자와 교인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는 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교회에서 가르치기에 부활을 ‘인정’한다. 의심하거나 부인하면 공동체 내에서 설 자리를 잃기에, 습관적으로 아멘을 복창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적 동의에 기반한 ‘박제된 교리’일 뿐, 삶을 관통하는 ‘역동적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믿음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지독한 세속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
사순절부터 고난주간, 부활 주일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그 열심의 동기는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상당수 기복주의와 율법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부활의 현장에 참여함으로써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사후에 더 큰 상급을 챙기겠다는 계산적 열심이다. 십자가의 자기 부인과 부활의 생명력이 주는 은혜보다는, 종교적 행위를 통해 신(神)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거래의 심보가 앞선다.
복음을 깨닫지 못한 채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흐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겠는가. 죽음을 이긴 생명이 내 안에서 요동치지 않는데, 단순히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명제를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관성일 뿐이다.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죽음 위로 덮쳐오는 '사건'이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처절한 자기 부인 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취하려 든다. 죽지 않은 자에게 부활은 일어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아를 품고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
내 안의 탐욕이 죽고, 세상을 향한 갈망이 끊어지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신비가 없다면 우리가 외치는 부활은 공허한 메아리다. 복음은 우리를 더 나은 도덕적 시민으로 만드는 수양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려내는 창조적 능력이다. 이 생명력의 박동이 멈춘 채 행하는 모든 종교적 열심은, 결국 자기 위안을 위한 '자기 복음'에 불과하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부활을 선포하고 싶다면, 화려한 시가행진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기보다 '내 안의 예수가 살아있는가'를 먼저 자문해야 한다. 부활은 일 년에 한 번 꺼내 보는 기념품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실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교리라는 차가운 감옥에 갇힌 예수를 해방시켜, 우리의 삶으로 그분의 살아계심을 증명해야 할 때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대한 '종교 행사'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실재'다.
출처 : 복음in(https://www.ing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