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령 선포로 인한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대통령은 “국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탄핵과 특검, 야당 대표의 방탄으로 국정이 마비 상태에 있다.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다”라는 등의 말로 계엄령 선포의 변(辯)을 늘어놨다. 이러한 이유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 국민에게 통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판단이었다는 것이 여론의 중론이다. 결과가 말해주듯 계엄령은 먹히지 아니했다.
계엄령 선포의 변을 들어보면, 국정 동력이 거대 야당의 벽에 막혀 힘을 쓰지 못하는 현실의 암담함에 울분이 치솟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대통령의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이를 타개할 방법이 계엄령 선포 외에는 어떤 것도 없었는지 묻고 싶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정치판에서 난관을 극복하고 나갈 방안을 찾기가 녹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극단적 처방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다는 것에 국민은 화가 났다.
여야 정치인은 물론이고 모든 국민이 대통령 말에 굽신거리며 다 따라준다면 대통령 하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대통령의 직이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아무리 유능한 대통령이라 해도 쉽고 편하게 그 직을 수행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통령에게는 막강한 권한을 국민이 위임해 준 것이다. 이는 권한을 선용하여 국민을 잘 섬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망각했는지 모르지만, 총칼을 이용해 권력을 남용하는 대통령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대통령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 중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한국 교회 대부분 목회자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교회의 인사, 재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담임 목사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점이 이를 말한다. 교회에서 무소불위의 존재가 담임 목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의 말이 모두 법이 된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교회도 있다. 특히 담임 목사가 개척하여 크게 성장한 교회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담임 목사에게 주어진 권한을 섬기는 일로 잘 선용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자 중에서 담임 목사에게 반기를 들거나 목회 활동에 제동이라도 걸 때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의 말을 경청하며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아닌 것은 인내하며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무시하고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총칼로 다스리듯 할 때이다. 담임 목사의 문제가 노출될 때 옳은 말을 하는 신자를 강단에서 가차 없이 공격하거나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라고 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게 총칼로 다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목회자라고 하여 완전할 수는 없다. 목회하면서 시행착오도 일으키고, 본의 아니게 실수도 한다. 판단 미숙으로 교회를 어렵게 만들 때도 있다. 그럴 때 교회 직분 자들이 시정을 요구하거나 사역에 반대를 표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언로가 열려있는 교회가 많지 않다. 담임 목사가 하는 일에 문제가 보여도 입을 닫고 있어야 한다. 입을 열면 담임 목사에게 배척받아 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여도 입을 봉하는 게 상책이라고 여긴다.
계엄령이 선포된 나라의 상황과 다르지 않은 교회가 적지 않다. 이런 교회는 담임 목사가 제왕적 목회로 전횡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단 사이비 교주처럼 군림한다. 담임 목사가 부당한 언행을 보여도 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분위기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의 전횡으로 신자들이 억압되어 있다. 그래서 고통당하며 상처받고 방황하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탄절이 또 다가왔다. 성탄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섬기러 오신 날이 아닌가? 이런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제왕적 목회로 신자들의 자유를 빼앗고 군림한다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번 성탄절에는 계엄령 선포 후유증 때문인지, 유난히 자유와 섬김이 크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