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사이에서의 목회적 딜레마
2022.06.15 10:20 댓글 0
“율법과 기복 논리의 설교는
교인이 열심 내고 헌금을 잘하게 되어 교회
양적 성장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나
영혼을 살릴 수는 없다,
복음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기에 그렇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주님께 받은 사명이라고 했다(행20:24).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오늘날의 모든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전하라고 세워진 주님의 일꾼이다. 그런데 복음 전하는 일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만 국한하기 쉽다. 하지만 교회 안에도 복음을 들어야 할 교인이 많다.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로 복음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로마교회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인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롬1:15).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서이며,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로마의 교인들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로마교회는 바울이 복음 전하여 세워진 게 아니지만, 로마에 교회가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로마의 교인은 복음을 이미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는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다. 율법과 은혜의 복음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고 시원하게 설파한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로마의 교인이 복음을 들었을지라도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교인들이 이미 복음을 들어서 안다고는 해도 율법과 은혜의 복음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울 필요가 있다. 교인들의 영적 수준이 천차만별이기에 그렇다.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깨달은 교인도 있지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모르는 교인이 허다하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적으로 매우 척박하다. 복음이 사라지고 율법주의와 기복주의 신앙으로 만연한 현실이 이를 증거 한다. 이는 많은 목회자가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가 성경을 읽어 놓고 설교만 하면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어보면 거의 다 복음이 아닌 율법을 말할 뿐이다. 필자도 한때는 그런 목사였다. 복음적 설교라고 생각했는데 복음을 깨달은 후에 살펴보니 율법적이고 기복적인 설교였음을 발견했다.
율법적 설교는 인간이 뭘 잘해야 복을 받는다는 논리로 말한다. 대표적인 게 주일예배를 잘 드리고(일명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을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을 알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감사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헌금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란 이미 받은 구원의 복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전부 구원의 복이다. 세상에서 잘 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들어 반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알고 있다면 성경을 좀 더 연구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문제는 율법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 푹 젖은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들으면 열심도 식고 하던 헌금도 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열심히 충성하고 헌금을 잘하여 복을 받는 게 아니라고 말하니 그럴 만도 하다. 열심히 충성하고 헌금하면 만사형통의 복을 받는다거나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준다고 해야 신이 나고 동기부여가 되어 열심을 내고 충성할 텐데, 그렇지 않다니 누가 충성하며 헌금을 잘하겠는가?
여기에 목회적 딜레마가 있다. 율법과 기복 논리가 아닌 은혜의 복음을 전하면 교인들의 헌신도가 떨어지고 재정도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적 설교하기가 두렵다는 목회자도 보았다. 이래서 복음적 설교가 두렵다면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율법과 기복 논리의 설교는 교인이 열심 내고 헌금을 잘하게 되어 교회 양적 성장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나 영혼을 살릴 수는 없다, 복음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기에 그렇다(롬1:16). 그러니 교회에 어떤 현실적 손실이 온다고 해도 은혜의 복음만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세준 dsr1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