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직분제도 문제점과 직분 자의 참된 역할 2024-01-22 오전 10:54:00 성결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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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는 교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직분(직원) 제도를 두고 있다. 직분에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권찰 등이 있으며, 교파에 따라 교단 헌장에 명시한 직분의 명칭이나 역할, 직분의 개념이 다른 점도 있지만, 면면히 살펴보면 대동소이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직분 자를 세우는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는 교회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문제를 든다면 임직 자에게 받는 금품 수수일 것이다. 직분 받음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라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반강제의 거출에 해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는 교인이 나오기도 하고, 심한 경우 교회 분란의 원인이 된다.
이 같은 불미함이 교회 안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세간의 도마에도 이런 사례들이 오르내리며 한국교회의 부정적 이미지에 덧칠하는 사태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돈 없으면 교회에 갈 수 없다느니, 돈 잘 내는 교인만 좋아한다느니 하면서 입방아 찧는 사람들에게 말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이 그렇지 않아도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교회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한국교회에 직면한 문제가 전적으로 직분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오늘의 교회 위기를 불러온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짚을 수 있지만, 그런데도 직분 제도에서 발생하는 말썽거리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게 한국교회의 뼈아픈 지점이다.
직분 제도 무엇이 문제일까?
교회에서 직분 받음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같지 않다. 직분을 받고 싶어 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직분 받는 것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며 어떤 직분도 거부하고 받지 않는 성도가 있다. 하지만 교회가 직분을 주면 대부분 성도는 잘 받아들인다. 직분을 받는 성도에게 직분을 왜 받느냐고 물으면 그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에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함일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잘 감당하면 이 땅에서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상급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분 자 명단에서 빠지면 복을 받는 길이 차단된다는 정서가 작용하여 심할 경우 시험에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직분이든지 직분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성도라는 존재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직분을 받아 헌신하며 사는 것뿐이다. 성도가 된 자체가 복이다. 더러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에서 용서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한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수없는 복을 받은 존재가 성도이다. 영원히 멸망할 존재가 이런 복을 받았는데, 무슨 복을 더 원한다는 것인가? 성도로서 이미 받은 복보다 더 좋은 복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복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된 성도가 직분을 받아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 감사와 기쁨으로 어떤 직분이든지 겸손하게 감당할 것이다. 어떤 직분이 주어지든 불만이 없다.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로 주신 복이 너무 크고 놀랍기에 어떤 직분이든지 과분하게 여길 뿐이다.
그러나 직분을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보면 원하는 직분이 주어지지 않을 때 교회의 불만 세력이 되어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서리 집사가 안수 집사 되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권사나 장로 되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데 자신이 바라던 직분이 아닌 현재의 직분 그대로 일 때, 마치 승진에서 탈락한 기분을 느끼는 직분 자가 있다.
왜 이런 기분을 갖게 되는 것일까?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하는 폐단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한국교회에서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교회 직분을 계급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나 성도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많은 성도가 직분을 서열이나 계급의 개념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단계적 직분 제도에서 비롯된 직분의 오해 때문이다. 단계적 직분 제도란 성도에서 서리 집사, 그다음 단계로 안수 집사, 또는 권사, 그리고 최종 단계가 장로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단계적 직분 제도가 성경적일까? 이 제도를 도입할 때는 성경적이라는 확신이 있었을지 모른다. 관점에 따라 그렇게 보기도 하겠지만, 성경적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직분은 은사이기도 했다(고전 12:4~6). 은사에 따라 직분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본 교단의 헌장 제2절 「직원」에서도 ‘권찰’ ‘권사’의 근거에 “성도는 각각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은사대로 교회에서 봉사할 직임을 성경에서 이미 가르쳤으며”라고 명시하고 있다.
집사나 장로에 대해서는 “받은바 은사대로”라는 문구가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세운다고 규정하고 있어 은사대로라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헌장에서도 직분을 은사로 보고 있는데, 과연 교회에서 은사에 따라 직분 자를 세우고 있을까? 그런 교회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교회가 지켜지지 않는 게 현실일 것이다.
은사에 따라 직분 자를 세우는 게 성경적이라면 단계적 직분 제도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를테면, 봉사하는 은사가 있다면 집사 직분에 해당한다.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있다면 권사 직분에 적합하다.
리더십의 은사가 있다면 장로직이 알맞다. 하지만 직분 자를 세울 때 이런 원칙을 적용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봉사하는 은사가 있어 집사로 세웠지만 리더십의 은사가 없다면, 굳이 장로로 세울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리더십이 없는 집사인데, 헌금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장로로 세우는 교회들이 있다. 집사로서 섬기는 일은 잘하는데, 권면하고 위로의 은사는 없다. 그런데 권사로 세운다.
은사대로가 아닌 교회 경력이나 직분 경력에 따라 직분을 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회 다닌 지가 수년이 지났는데 성도로 있으면, 집사라도 시켜야 한다며 집사로 임명하는 사례도 있다. 그런데 집사의 은사와는 거리가 먼 성도라서 호칭만 집사일 뿐 집사의 역할을 전혀 못 한다. 그리고 집사로 십수 년 봉사했으니 권사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가 교회에서 힘을 얻을 때도 있다. 따라서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없음에도 권사로 세운다.
그러다 보니 위로와 권면은커녕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권사도 적지 않다. 그리고 리더십이 없는 집사가 장로 되면 교회의 중요한 일을 추진하거나 실행할 때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본의 아니게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직분 자의 참된 역할이 무엇일까?
교회 직분은 특정한 성도의 체면을 세워주는 용도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유명 인사가 교회에 나왔다. 혹은 유명 인사는 아니라도 큰 사업을 하면서 헌금을 많이 하는 교인이 등록했다. 그러면 이런 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특정 직분을 주는 교회도 있다. 심지어 본인이 극구 사양하는 데도 장로라는 감투를 씌워준다. 이 같은 식의 직분은 감투에 불과하기에 하는 말이다.
직분에 대한 남발이요, 남용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를 든다면 교회 성장의 욕심일 것이다. 목회자나 성도들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사모한다.
자나 깨나 교회 성장을 부르짖는다. 문제는 직분을 교회 성장의 도구로 여기는 데 있다. 교인 한 사람을 교회에 붙잡아두기 위해 직분을 준다는 것이다. 직분이라도 주면 교회를 떠나지 않고 좋은 일꾼이 될 것으로 생각도 하지만, 이는 착각일 수 있다.
물론 그런 교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분이 교인을 붙잡을 수 없다. 죽도록 충성할 것 같은 장로도 수틀리면 교회를 쉽게 떠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직분을 교인 한 사람이라도 붙들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직분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보는 데서 무분별하게 직분을 남발하게 된다. 이러한 일로 인해 어떤 교회는 전 성도가 다 직분 자이다. 너도나도 집사, 권사이다 보니 직분을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고, 직분의 권위와 가치는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직분은 어지간하면 누구나 받는 줄로 생각하여 교인이 새로 오면 곧바로 직분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곤 한다.
새 신자가 오면 직분이 무엇이냐고 먼저 묻게 된다. 대부분 교회가 직분을 쉽게 주기 때문에, 직분 없이 오는 교인이 거의 없다. 그러니 이를 무시할 수도 없어 본인이 말하는 직분대로 호칭하기 일쑤고 결국 직분 자로 인정하게 된다.
직분 자가 너무 많다고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다. 직분 자를 세우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직분 자를 세우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엡 4:11~12).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이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현재형이다. 교회를 세워가는 일은 단순히 양적인 성장을 도모한다는 게 아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과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엡4:12).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온전하게 하는 일이란 성도를 회복시키고 준비시키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봉사의 일이란 예배당에서 봉사 잘하게 훈련한다는 말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일을 의미한다.
직분 자가 기본적으로 가장 능하게 할 부분은 복음의 증인 역할이어야 한다. 복음 전하는 일은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 직분 자는 성도들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도록 회복과 준비시키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분 자가 먼저 복음의 진리를 바로 깨닫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을 복음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준비시킬 수 있다. 직분 자가 복음의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누구를 회복시키고 준비시킬 수 있겠나? 문제는 많은 직분 자가 복음의 진리를 잘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말에 발끈할 직분 자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 받는다고 알면 복음을 안다고 할지 모르나, 이게 복음이라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다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은혜의 개념조차도 왜곡했다.
은혜는 하나님이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호의다. 구원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큰 복을 값없이 은혜로 주셨다. 이를 부정할 성도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성도가 무엇을 잘해야 은혜받는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헌금을 잘하고 봉사를 잘해야 은혜를 받고 복 받는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은혜의 개념과 상치되는 가르침인데도 전혀 성도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도 복음을 안다고 하면 어불성설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할 문을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한다(골 4:3). 하나님은 이 비밀을 직분 자에게 맡기셨다(고전 4:1). 그러니 그리스도의 비밀인 복음을 모르는 직분 자라면, 하나님이 세운 직분 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세운 직분 자일 것이다.
하나님이 세운 직분 자라면 구원의 비밀인 복음을 아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구원의 비밀을 몰라도 교회에서 봉사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다. 복음을 아는 직분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여기서 충성이란 단어는 신실하다는 뜻이다. 복음을 신실하게 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충성을 구하라고 한 것이다. 거짓 복음이나 유사 복음이 아닌 참 복음을 신실하게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직분 자가 되기를 사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