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체
초대교회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였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 사람은 격려하고 격려를 받을 때 마음이 따뜻해진다. 비판을 받거나 남을 비판할 때는 마음이 차가워진다. 사람은 외롭다. 살아간다는 것은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등감 가운데 살아간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은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인 인간이다. 그래서 격려가 필요하다.
‘격려’(encouragement)라는 영어 단어 안에는 ‘용기’(courage)라는 단어가 담겨있다. 격려란 낙심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또한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도록 도와주고 잘하는 일을 더욱 잘하도록 돕는 것이다. 격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을까?
첫째, 위로를 통해 격려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위로는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위로는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다.
둘째, 함께 있어 줌으로 격려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형통하고 성공하고 부요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실패하고 병들고 가난해지면 사람들은 우리 곁을 떠난다. 바로 그때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친구다.
셋째,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격려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격려했다. 격려란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격려하는 따뜻한 언어로, 사랑스런 몸짓으로 할 수 있다.
사람은 책망을 통해 바로 잡아지지만 격려를 통해 성장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책망보다는 격려를 많이 하는 것이 지혜롭다. 칭찬과 마찬가지로 격려를 잘하기 위해서는 관찰을 잘해야 한다. 관찰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관심은 바로 사랑이다. 격려는 사랑의 예술이다. 인간관계를 잘 맺는 예술이다. 가정을 아름답게 세우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사랑의 예술이다.
<강준민, “따뜻한 교회 공동체의 언어문화” 「목회와 신학」201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