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야성(野性)
동물원에서 아기 낙타가 어미 낙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우리는 등에 혹이 있어?” “응, 사막을 다닐 때 목마르면 마시도록 하는 물 저장소야,” “그러면 왜 눈썹은 긴 거야?” “응,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막아 주기 위해 조물주가 만드신 거야.” 그러자 아기 낙타가 아빠 낙타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 있는 거야?” “…,”
과거에는 ‘짐승남’, ‘근육남’, ‘야성적인 남자’가 인기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리스도의 제자는 ‘야성’이 생명입니다.
“한국교회를 지탱해 왔던 야성과 역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청계산 등 전국에 있는 기도원마다 밤에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십니까? 삼각산 돌들이 반들반들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곳은 지금 잡초들만 무성합니다.” 오래 전 서울의 어느 목사님의 말입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역동성’과 ‘야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야성의 상실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성’ ‘지성’과 함께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야성을 갖는다는 것은 야전성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야전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광야정신’입니다. 우리는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광야에서 믿음의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치열한 영적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전사이어야 합니다.
<리민수, 「캠퍼스 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