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성도 고양이 신자
사 1:11~14
밥 쇼그린(Bob Sjogren)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Cat and Dog Theolog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일상에 아주 가까운 두 애완 동물의 특성을 들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얼굴이 붉허지도록 적나라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고양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먹여주고, 사랑해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 쓰다듬어주는 것을 보니 분명히 자기가 하나님일거라고 착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고양이는 항상 서운한 마음으로 산다. 고양이과 교인들이 갖는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나의 도우미"라는 것이다. 고양이과 교인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고양이과 교인이 갖는 삶의 목적은 '나'다.
성경에는 고양이과 교인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타락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그 핵심은 하나님을 그들 자신을 도와야 할 하늘의 도우미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이 하늘의 도우미가 하나님인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할 때, 그들은 주저 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돌아섰다.
그 이름이 여호와든 바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를 행복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도와주는 신이 참신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거짓 교사들이 백성들의 영혼과 삶을 피폐하게 만든 것은 이런 고양이 신학을 백성들과 성도들에게 주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고양이 신학을 즐거워하는 고정간첩 같은 육(죄악인 근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고양이 신학에 발목이 잡힐 때 영적 성숙이 중단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신앙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신자에게는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생각과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가 목적이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으로 여긴다.
둘째, 신앙이 형식화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고양이 신학을 채택했을 때 가장 먼저 발생한 일은 예배와 신앙의 형식화였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준엄한 질책을 보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사 1:11~14)
하나님은 왜 그렇게 정성스럽게 드리는 숫양의 번제와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이 지키는 안식일을 피곤해하시고 힘들어하셨을까? 그들은 정성스럽게 형식을 잘 갖춘 종교 의식을 치르고 있었지만, 그 목적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우상으로부터 받아내기를 원하는 자신들의 복을 위해서 정성을 다 바치는, 심지어 자식까지도 잡아 바쳤던 이방인들과 같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감동시킬 '영적인 뇌물' 증여 행사를 진지한 태도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 신자는 하나님이 아니 자신에 대한 사랑과 충성과 관심 때문에 하나님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셋째, 신앙이 현세적인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고양이 신자의 관심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이 땅에서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잘살고, 건강하며,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물질적으로 풍성하며, 자녀들은 공부 잘하고... 고양이 신학의 핵심은 분명하다. "나의 삶의 목적은 나 자신이다."
반대로 강아지 신학도 있다. 강아지 신학의 핵심도 분명하다. "내 삶의 목적은 하나님이다." 강아지는 사람들이 자기를 먹여주고, 사랑해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쓰다듬어주는 것을 보니 그들은 하나님일 거라고 생각한다.그래서 강아지는 항상 황송해하는 마음으로 산다. 강아지는 충성스럽다. 주인의 사랑에 온몸을 던져 헌신과 충성으로 보답한다.
강아지과 성도들이 갖는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을 섬기는 종'이라는 것이다. 강아지과 성도에게 하나님은 영광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시다. 그들은 한마디로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강아지과 성도의 모습이 막연하게 느껴지면 사도 바울을 보라. 그림이 또렷해질 것이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0~21)
미신과 참 신앙의 경계는 대상에 있다기보다는 그 숭배 목적에 있다. 무당은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 나를 도와주도록 신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신을 변화시켜 내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미신이다. 참 신앙은 신에 의해 내가 변화되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내가 변하면 신앙인이고, 신을 바꾸려고 하면 무속인이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기준과 목적은 나 자신이다. 그와 달리 크리스천의 목적은 하나님이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양승헌, 「크리스천다움」 (서울: 디모데, 2009), 42~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