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구원론의 문제점에 대하여...
가브리엘 10.11.22 조회수141
한국교회에 팽배한 저급한 구원관이 교회 타락의 주범 중 하나라고 합니다.
바른 구원관의 정립에 대하여 다함께 생각을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역시 지난날 의 신앙 역시 아래 수준에 머물렀던것 같습니다.
모두 삶의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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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구원론의 문제점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개신교 구원론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개신교 구원론은 죽은 다음 ‘천국이라는 이름의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방법론(methodology)의 성격이 짙다.
시중에 유행하는 천국 가는 방법론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이다.
죽은 다음 천국이라는 좋은 데가 있고, 지옥이라는 무서운 데가 있다.
우리는 천국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생전에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면 된다.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영접 기도를 따라하는 것이다.
영접 기도를 따라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있다. 너무 쉽다 그렇다,
천국 들어가는 건 너무 쉽다. 그래서 은혜라고 부른다.
이게 전부인가?
전부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전부가 아니다. 뭔 소린가?
전부가 아니라면 또 구원에 필요한 다른 ‘방법’이 있는가? 있다. 뭔가? 교회 다니는 것이다.
교회를 다닌다 함은? 매주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내고, 성가대나 교사로 봉사하고,
목사님 잘 섬기는 것이다. 이상이 구원 받는 비결이다.
이러한 통속적이고 저급한 구원론은 오늘날 개신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는 주범 중 하나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몇몇 목회자나 신도들의 윤리적 타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오해한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듯이
오늘날도 적지 않은 교회와 신도들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앞으로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위에서 말한 구원의 삼중적 차원을 가지고 보자면
그것은 구원의 가장 중요한 차원이 가장 많이 무시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개신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원의 삼중적 차원을
각각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라는 틀로 이해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 세 차원 중에서 칭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성화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화 없이도 구원 받을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칭의는 없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화는 점진적으로 장차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칭의라는 것이다.
때문에 통속적 구원론은 칭의에서 영화로 건너뛴다.
이와 함께 새 언약을 맺은 새 백성의 새로운 삶(new life)에 대한 강조는 무시된다.
구원의 두 번째 차원,
곧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의 발탁과 그에 합당한 삶이 무시되자 성서의 구원 이야기는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다.
칭의의 구원은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해 주는 개신교식 면죄부로 화하고 있다.
교회는 ‘믿겠습니다’는 단 한 마디 립 서비스만으로 죄인들에게 천국을 무상 증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을 한 마디로 하면 과도한 티켓 남발로 말미암아
천국 티켓 인플레이션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빈의 ‘견인 교리’가
유치하고 저급하게 융통되는 통에 천국행 티켓은 ‘살인 면허’로 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인 면허증이 되어 버린 천국행 티켓은 과거의 모든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몽땅 용서해 준다고 경악할 만한 약속을 남발한다.
때문에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도무지 지옥에 갈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메가처치는 다소 세련되지기는 하지만
본질상 대동소이한 저급한 구원론을 대량으로 유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메가처치는 구원을 교회 출석과 맞바꾸고 있다.
적지 않은 메가처치는 예수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오해하여 교회 안에
가라지가 존재할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 놓는다. 많이 모이면
그 중 알곡도 많아지리라는 단순 논리를 적용하기 때문에,
많이 모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무조건적으로 교회 성장을 부추기고 있다.
메가처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물어오는 것 자체를
전도와 선교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가 신자의 지상 과제인 양 선전함으로 전체 교인들을
사람들 물어오는 호객꾼들로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호객 행위가 불신 영혼들에게 구원을 수여하는 자비로운 은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 백성의 새 생활이란 예배와 전도뿐이다.
조금이라도 삶을 강조하면 행위 구원론 혹은 율법주의라고 낙인 찍어버린다.
그러니 오늘날 개신교회는 구조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교인들 중에 허다한 이들이 온갖 범죄와 비리에 연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행여 누가 뭐라고 한 소리 하면 한다는 말이, “알곡인 줄 알았는데, 가라지였나봐”이다.
이건 완전히 ‘아니면 말고’식이다. 여기 저기 교회의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고,
열매 없는 모습들이 노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들은 소수의 몇몇 사람들을 지목하여
희생양으로 매도하고 자신들은 도무지 바뀔 기미가 없다.
이러한 잘못과 오류의 밑바닥에는 바로 교회가 그릇된 구원론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기 때문이리라.
필자가 너무도 민감한 구원론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구원론 이야기를 하자니 솔직히 좀 떨린다. 이단 소리를 들을까봐.
하지만 이 그릇된 구원론이 교회의 타락과 부패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 조금 더 자세히 문제를 추적해보자.
신광은/ 열음터공동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