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4)
한운석 10.12.14 조회수133
"값을 지불하라"
연속 설교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2 : 시편 51:1-17
1. 영화 <밀양>의 이야기는 한국의 몇 안 되는 구도적 소설가 이청준씨의 단편 <벌레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을 소설가 출신의 영화감독 이창동씨가 그 나름의 새로운 이야기로 각색한 것입니다.
원래 이청준씨는 <벌레 이야기>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값싼 용서에 대해 비판하려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맑은 하늘을 즐기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 소설의 이야기의 틀을 많이 바꾸기는 했지만,
이 주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애와 박도섭이 마주하는 교도소 면회 장면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난주에는 신애의 연극이라는 관점에서 이 장면을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참된 용서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박도섭의 고백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이 장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치심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숨기고 싶었던 기독교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것처럼 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박도섭과 신애,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고,
두 사람 모두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그 모든 말들이 가식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단지 그들만의 문제라면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애와 박도섭이 연출한 장면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를 비판할 의도를 전혀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기독교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안에 반영된 우리의 자화상이 우리 자신을 더더욱 낯뜨겁게 만듭니다.
2. 박도섭이 신애에게 하는 고백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그가 고백한 것으로 보아, 그리고 그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보아, 그가 뭔가 초월적인 영적 사건을
경험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박도섭이 신애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죄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십시다. 자식들이 서로 싸워 한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 합시다.
그럴 경우 상처 입은 자식보다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픈 법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상처 입은 그 형제에게도 사과해야 하지만,
부모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자식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었으면,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51편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지은 회개 시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전성기 시절에 생애 가장 수치스럽고 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뒤탈을 없애기 위해 우리야를 불리한 전쟁에
내보내어 죽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완전범죄를 꾸미려 했지만, 예언자 나단이 찾아와 그 죄를 고발합니다.
대이스라엘 왕국의 황제 다윗은 무력한 한 예언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오늘 읽은 회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3-4절).
우리야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깨달은 다윗은
맨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야와 밧세바,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지극히 아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준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권력을 오용한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셨던 신뢰를 배반한 것에 대해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3. 이런 빛에서 보면, 박도섭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고백한 대목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잘못이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행하는 잘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을 때도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알기 어렵고,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통회 자복하고 용서를 받고 나면, 자신이 상처를 준 그 사람 앞에 가서
잘못을 시인하고 처분을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당사자를 대면하고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필요한 모든 희생과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생깁니다.
어느 무신론자 철학자가 죽으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들 기독교인들에게 부러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용서하실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용서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 실로, 우리를 용서해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을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찾아가 기댈 언덕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댈 언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품어주시고 씻어주시며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 은혜밖에는 죄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값싼 용서라고 비판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회개의 기도만 드리면 조건 없이 용서를 받는다니,
이것처럼 값싸고 형편없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도 한때 이 용서의 교리에 대해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의 이해가 짧을 때 제게는 십자가가 마치 용서 자판기(Forgiveness Vending Machine)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회개라는 동전을 넣으면 털컥 하고 용서가 나오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믿고, 회개라는 동전을 넣고 용서라는 물건을 손에 쥐곤 했습니다.
그렇게 받아든 용서는, 마치 질 나쁜 자판기 커피처럼, 값싼 위로를 제공하고는
잠시 후 잊혀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제 자신의 죄에 대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며칠 동안 금식하며
십자가 밑에서 기도로 지내며 눈물의 나날을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회개와 용서의 진리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1달러 지폐처럼 값싼,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떨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참된 회개임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는
질 나쁜 자판기 커피처럼 잠시 잠깐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시켜 주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숨겨진 상처까지도 치유하는
엄청난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리고 저는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치러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온 몸으로 떨고 마음의 찢김을 경험해보신 분이라면
누구든지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실로 통곡하고 마음을 찢는 것이 얼마나 큰 값을 치르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거짓된 회개, 습관적인 회개, 교리적인 회개는 값싸고 쉬운 일이지만,
진정한 회개는 값비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 위에서 치르신 그 값비싼 대가에 의지하여 치르는,
아주 값비싼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는 일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은총입니다.
4. 박도섭은 진실로 회개했을까요?
그가 받았다는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참된 용서일까요?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신애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고백하는 박도섭의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신애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뻔뻔해 보이지 않습니까?
박도섭은 신애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어야 하고, 눈물 콧물로 울며 잘못을 빌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진짜였다면 더욱더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가 신애를 만나기 전에 감옥 안에서 얼마나 통회하며 회개했는지 모르지만,
그토록 큰 아픔을 준 당사자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심하게 무너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저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나면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을 대면할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당사자 앞에서 뻔뻔하게 행동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형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의 죄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는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는 한 편,
그들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더욱 여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로 인해 사람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 더욱 예민해지고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 51편 4절에서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다윗이 고백한 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마치 "나는 주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아픔을 더 예민하게 느끼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후,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신애가 교도소를 찾아가기 얼마 전, 운전하다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지나가는 행인을 칠
뻔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행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이 말은 박도섭의 고백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이 장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박도섭이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는 말로 때우는 것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신애를 대신하여 분노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치장되어 있는 그 무책임한 사과로 인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용서를 시도하는 신애는 안쓰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를 말하는 박도섭은 가증스럽게 느껴집니다.
파렴치해 보일 정도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잘못 표현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 있음을
우리 모두는 심각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기독교 복음의 대변자인 양 자처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위 믿음 있다는 사람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 직분 높다는 사람들,
열심이 특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은 더욱 자중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독교가 얼마나 오해받고 지탄받고 있는지요!
차라리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