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신 예수님(3)
장면: chap 15, from 1:30:41 to 1:34:29
범인에게 용서한다고 말할 때, 신애의 눈빛에서 번득인 증오를 보셨습니까? 범인 박도섭이 자신도 하나님께 이미 용서 받았다고 말할 때, 신애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자신 앞에서 비참하게 깨어져 용서를 빌어야 했을 박도섭은 너무나도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를 고백했습니다. 눈물로 빌었어야 했을 그는 미소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신애는 분노했습니다. 그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교도소 마당에서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의 분노가 이렇게 컸습니까? 그가 이제까지 연기해 온 연극이 무참히 짓밟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은밀한 복수극이 좌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공들여 연기해 온 연극이 그만 절정의 순간 직전에 파장난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난 신애는 자신의 연극을 망가뜨린 하나님께 대한 복수를 시작합니다. 신애가 예배당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 난 후, 목사와 교인들이 신애의 집에 심방하러 간 장면에서 신애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면: chap 16, from 1:40:40 to 1:42:50
신애는 야외 부흥회를 방해하는 것으로, 강장로를 유혹하는 것으로, 철야기도회를 방해하는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복수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 복수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강장로를 유혹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자살함으로 보기 좋게 복수하려 했지만, 끝까지 고통을 견딜 용기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서 원수의 딸과 마주치게 만들며, 끊임 없이 자신의 삶에 참견하고 개입하고 방해합니다. 처음에는 “좋아, 보기 좋게 당신에게 복수하겠어!”라는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던 신애는, 점점 지쳐가면서 “왜 이렇게 나를 졸졸 좇아다니며 못살게 구는 겁니까?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는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합니다.
이렇게, 한 편으로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점점 지쳐가면서, 신애는 점차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꾸며진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있는 그대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신애가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장면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머리를 자르다 말고 미장원을 뛰쳐 나온 후에 옷가게 주인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옷가게 주인은, 정신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한 신애를 반갑게 맞으며 안부를 묻다가, “아니, 머리가 이게 뭐야?”라고 묻습니다. 신애가 “머리 자르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중간에 나와 버렸어요”라고 대답하자, 가게 주인이 “미쳤는가 봅다!”라고 응수합니다. 이 말 끝에 그 여주인은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 막습니다. 신애가 진짜로 미쳤었기 때문입니다. 말 실수를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가게 주인에게 신애는 멋적은 웃음으로 응수하다가, 나중에는 함께 박장대소를 합니다. 자신이 미쳤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5.
이 영화에서 하나님은 신애의 연극을 방해하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신애의 아들 준의 살해를 계획하신 것은 아닙니다만, 그 비극 안에 담겨진 어떤 신비로운 뜻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연극을 멈추고 현실을 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애는 불행하게도 남편의 죽음을 통해서도,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현실을 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자신이 연출한 연극 속에서 여주인공으로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신애의 연극을 망쳐 놓고 현실로 끌어 내셨습니다.
연극이 깨졌다는 사실이 신애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불행이었습니다만, 이 영화의 마지막은, 그것이 바로 신애에게 비밀스러운 축복이라는 암시를 던져 줍니다. 자신이 꾸민 아름답고 환상적인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때론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귀찮고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현실로 나오는 것이 축복이요 구원이라는 암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치유와 기적을 통해서 신애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정 반대로, 고통스럽지만, 신애가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어하는 연극을 깨뜨려버림으로써 그를 구원하십니다. 초라하고 힘겨운 현실에 눈을 뜨고 그 현실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 구원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해도 연극은 가짜이며, 아무리 초라하고 힘겨워도 현실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현실을 떠나서 연극 속으로 도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만든 각본 속에 들어가 자신이 스스로 만든 역할 속에 빠져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듯이 가장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아닌 뭔가가 된 것처럼 가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받아들이기에 어려워도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자신의 참 모습을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내 처지에 진실하고, 내 신앙에 진실하고, 내 입장에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원의 ‘밀양’ 즉 ‘은밀한 햇볕’(secret sunshine)이 깃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6.
오늘의 주제를 묵상하는 동안, 제게는 예수님을 만났던 한 부자 청년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 19:16).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계명이라고 했나요? 어떤 계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 것쯤이라면 자신 있다는 투였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일부를 언급하십니다. 그 청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거라면 문제 없습니다. 저는 그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까? 제게 필요한 것이 또 없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은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2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냉엄한 면을 봅니다. 잘 구슬러서 말씀하셔도 되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의 숨겨진 약점을 아프게 찌르십니다. 그 부자 청년은 스스로를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그는 계명을 지켜 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의를 쌓아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재산에 대해 그렇게 집착할 수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는 그의 의도는 참된 믿음에 이르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저 세상에서도 잘 살고 싶은 거대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 욕망이 정화되고 비워지는 것인데, 그는 그 욕심을 그대로 안고 믿음의 힘으로 내세의 축복까지 확보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성녀가 되고 싶어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러 간 신애를 뒤집어 엎듯, 그 부자 청년을 뒤집어 엎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는 말씀 앞에서, 신애처럼 무너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네 자신을 똑바로 보라.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신앙적인 자만을 내려 놓아라. 너는 많은 종교적인 허울로 너를 위장하고 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너는 가짜다! 네 가면을 벗어라. 하나님 앞에서 연극하려 하지 말라. 네 허위를 벗어라. 네 안에 있는 탐욕을 인정하라. 네 자신에게 정직해라. 돌아가, 깨어져 울어라. 그렇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
이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은 신애와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슬퍼했다고 합니다. 연극을 끝내는 것이, 가면을 벗는 것이,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어렵고 힘들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그 부자 청년이 위선과 가식과 허위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돌아왔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읽어 보면, 진정한 하나님 체험은 항상 자신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김없이 일어나는 최초의 사건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깨닫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통곡하는 사건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 안에서 일어난 회심 이야기들이 한 목소리로 증언하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만난 사람은 현실에 눈을 뜨고, 현실을 대면하고, 현실에 좌절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출발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연출한 연극을 살아갈 위험에 매우 취약하다는 말이 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허위와 가식과 위선과 위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셈이 됩니다. 불신앙이란 자신에 대해 속고 사는 것을 뜻하며, 거짓된 신앙은 종교적인 허울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을 말하며, 참된 신앙은 자신에 대해 눈을 뜨고 연극을 멈추는 것을 뜻합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격이 되고 비통한 아픔이 되더라도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참된 현실을 직면하게 해 주십니다. 그 때 인생은 제 길을 찾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텅 빈 무대에서 아직도 홀로 연극을 지속하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홀로 만든 세계 속에서 홀로 주인공이 되어 공주처럼 혹은 왕비처럼, 왕자처럼 혹은 왕처럼, 우스꽝스러운 삶을 살고 계신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조차 거짓과 허위로 삶을 꾸려가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혹시,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끝없는 거짓말로 속이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그 연극을 끝내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집스럽게 홀로의 연극을 지속하게 되면, 신애와 같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연극이 파장나기 전, 먼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현실을 대면하여, 연극이 아니라 참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믿는다고 하지만, 잘 믿는다는 허울은 있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면의 어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신애처럼,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연극을 더 멋지게 꾸며 보려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를 자신의 연극 무대로 만들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혹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조차 진실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과 가식으로 속속들이 오염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명심하십시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게 하는 참된 힘이 신앙인데, 이 신앙이 잘못되면 자신을 속이는 가장 교묘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본 부자 청년이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혹시나, 예수님의 눈에 우리도 부자 청년과 같은 모습은 아닐지요?
아, 두렵습니다. 이 모든 질문이 바로 저 자신에게 물어오는 성령의 음성처럼 들리기에, 두렵습니다. 자꾸만 제 마음 속에서 “나는 아닐거야!”라는 유혹의 음성이 들리기에, 두렵습니다. 제게도 벗어버려야 할 가면이 있고, 외면하지 말아야 할 현실이 있고, 인정해야 할 허물이 있으며, 거짓과 가식의 유혹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두렵습니다. 오직, 두 손 모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어릿광대짓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참되게 하소서. 진실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저뿐 아니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이같은 열망이 나누어지기를 그리고 그 열망이 조금씩 이루어져 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어릿광대짓으로부터 저희를 구하소서. 참되게 하소서. 진실되게 하소서.연극이 아니라 인생을 살도록 저희를 구하여 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