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생일 축하 선물로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라는 제목의 책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김 진 목사님으로 총신대학교와 한신대학교 대학원 및 독일 프랑크프르트대학 ph.D를 졸업 하셨습니다
한신대. 이화여대. 성공회대등에서 종교학. 신학 분야를 강의 하셨으며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재직 하셨습니다
김 진 목사님은 2004년도부터 인도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현재 인도 동북부 실롱에 위치한 마틴 루터 대학 방문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100분토론> 형식으로 꾸며진 이 책은 한국 기독교의 잘 못된 성공주의와 맘몬주의에 오염되어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예리하게 그러면서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분석하고 예수를 따르는 참된 기독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명저입니다
혼자 읽고 깨닫기에 너무 안타까워 가까운 분들과 함께 하고자 줄거리를 옮겨 보았습니다
한 권의 책을 몇 장으로 요약하다 보니 책의 내용이 훼손 되지는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만 글을 읽어 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책을 구입하셔서 전체를 읽어 보시므로 깊은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계기를 마련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적어 보았습니다
- 이 경 수 씀 -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으면 누구를 또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 예수님을 안 믿어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보통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님과 성경의 예수님은 같은 분일까?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기독교인 같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사람들을 많이 경험하게 되는데 너무 잔인한 핀잔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기독교인이니까 저렇게 행동할 수 있겠구나. 라고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 중에는 진실한 믿음을 지닌 예수님의 제자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 진실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들도 많다
현실 기독교를 잘 못 비판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 그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기독교를 비판할 때 부족함을 비판하는 것과 그 핵심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구별 되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모습을 “붕어빵기독교” 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붕어와 붕어빵은 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겉모양으로 봐서는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내용물을 보면 물고기 붕어와 밀가루 붕어빵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붕어빵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붕어를 닮은 겉모습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 전혀 관계가 없다 예수님과 오늘날의 기독교도 마치 붕어와 붕어빵의 관계처럼 예수님 없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왜 붕어빵 기독교가 되었는가? 여기에는 원인이 있다고 본 다
첫째 : 성경 해독력 저하 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문자 해독력”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 한다
이제 막 한글을 깨친 어린 아이가 신문의 글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뜻을 이해 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문자로 읽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담긴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을 듣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영으로 읽지 않으면 자신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읽어도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재미도 없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목사님들의 책임도 큰 것 같다 목사님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강조하지만 목사님 스스로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여 주지 못하고 또 이끌어 주지도 못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생명의 양식인 말씀 대신 영적으로 영양가 없는 싸구려 양식을 먹이게 되는 것이다
둘째 : 하나님 구원의 의미를 축소 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구원이 뭐냐”고 질문 하면 “예수님을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고 말 할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현실 보다는 내세. 지금 보다는 미래의 시공간에서 이루워지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의 죄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지극히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표현이다 예수님은 구원을 아주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말씀 하셨다 즉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전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의 가치와 양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것을 “새로 태어남”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전인적(全人的)인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붕어빵 기독교는 그 소중한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전부인 양 “천국 이데올로기”로 축소 시켜 버린 것이다
셋째 : 맘몬 신앙에 물들어 가는 기독교에 원인이 있다
기독교는 돈을 신으로 경배하는 맘몬주의에 대하여 경계하여야만 한다
돈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 돈을 어떻게 사용 하느냐에 따라 약도 될 수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기독교인의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헌금은 하나님께 바친 것을 교회 공동체가 겸허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이것이 거꾸로 되어 버렸다 일을 정해 놓고 헌금을 강요하고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은 교회 다니기도 껄끄러운 시대가 되었다
요즈음 목사들도 큰 재벌 기업이 성공한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큰 교회가 성공한 목회라고들 쉽게 말 하고 있다 교회나 목회의 성공을 헌금의 많고 적음. 교회 규모의 크고 작음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교회들 사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다
교인들이 많고 예산이 많은 대형 교회는 돈이 있으니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교회 교인들은 그런 교회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고 큰 교회로 쏠려 가는 수평 이동의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한 지역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 작은 상점들은 고객들이 뚝 끊어지고 그러다가 망하는 모습처럼.....
또한 교회를 사고 파는 모습을 보면 맘몬 신을 섬기는 기독교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회와 교인들을 사고 파는 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인수. 건물크기. 한 주의 헌금액수. 주변 조건등 투자 조건을 내세워 교회를 판다는 광고가 교회 신문에 버젓이 나 돈다
그런데 그런 광고를 보고도 “이제 말세”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다
비 기독교인들은 한심스럽게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목사들은 이런 광고를 당연하다는 듯이 들여다보고 또 좋은 “물건”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행위를 보고서도 기독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맘몬 주의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여야 할 것은 나를 포함해서 이러한 기독교를 비판할 때 어쩌면 비판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 돌아 봐야 할 것 같다
현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일수록 예수님의 말씀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비판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 하느냐.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판할 때는 그 비판의 몇 배가 되는 사랑이 없으면 비판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교회가 공동체라는 말은 이젠 옛말이다
교회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보이는 교회의 모습은 조직. 기관 .건물 등의 모습으로 드러난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우리가 신앙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 한다 믿음 안에서 서로 형제자매로 하나 되어 사귐과 친교. 예배와 교육이 이뤄지는데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초대교회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로서 온전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상실 했다.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라기보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향유물이 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꼭 예수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나 신앙 때문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더욱 더 깨닫기 위해서도 아니다
교회생활을 통해 하나의 문화생활이나 친족적인 분위기를 누리는 것에 더 큰 만족을 느끼는 기독교인들도 많다 한 동안 출석했던 교회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가 공동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 섬김과 겸손.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인간 모두는 하나님이 동등하게 창조한 피조물이다 그러니 사회적인 기준이나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자신이 누구보다 높다고 의식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교만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신보다 높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참 섬김은 바로 남을 자신보다 높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다
겸손이 뿌리라면 섬김은 그 열매이고 섬김이 꽃이라면 사랑은 그 향기이다
이런 사랑의 향기가 넘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진품 예수를 짝퉁 예수로 만들고 있다
짝퉁 예수란? 예수님 말씀의 왜곡이 결국 예수님의 존재를 왜곡하는 것이고 그것이 다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믿어지면 짝퉁 예수로 굳어지는 것이다 (고후11장4절)
사실 짝퉁 예수를 만들어 내는 주범은 거짓의 영 사탄이다 지금도 사탄은 짝퉁 예수를 얼마나 교묘하게 만들어 낼까 하고 혈안이 되고 있는데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여기에 놀아나고 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미혹 당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하고 순진한 교인들은 짝퉁 예수를 바라보면서 “주여” “주여”를 외치고 있으며 짝퉁 예수에 감명 받고 그를 향해 기도하고 눈물로 찬양하며 전도와 선교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광고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 코미디이자 사기다
설교 시간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고 설교자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해석이 주를 이루다보니 그것이 예수님 말씀인 줄 착각하고 듣는 성도들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진품 예수님과 상관없는 예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고 결국 짝퉁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주의를 하여야 한다 설교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선포되든 각자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소화하고 결론 짖는 교인들도 많다 자신이 경험한 틀과 내용에 들어오지 않는 예수님은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는 교인들도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축소되거나 변질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짝퉁 예수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숭배 받는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각대로 규정해 놓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빌면서 좌지우지 하려는 신앙을 말 한다
예배는 말 그대로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감사하고 사랑을 나누는 헌신을 말 한다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당연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분의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사랑으로 가득한 만남을 그저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로 떠받들 뿐 자신과 아무 관계를 짓지 않는 것 또한 예수님을 숭배하는 행위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표본으로 삼고 따르며 살아가라고 남겨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 계시면서 함께 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며 어떻게 하면 이 생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진품 예수를 찾아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정말 부분 중의 부분일 뿐이다 (고전13장12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젠가는 온전하게 알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
붕어빵 기독교와 짝퉁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도 우리는 미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만의 잘못도 아닐뿐더러 하나님과 예수님도 분명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별하여야만 한다 교회 안에 들어온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해야만 한다
그래야 온전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린 모두 죄인이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통해서 의인이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죄를 짓고 있지만 궁극적인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적용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구원 받은 의인이고 비 기독교인들은 마귀의 자식이자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독교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보다도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면 교회 안의 기독교인들 보다 교회 밖에 있는 비 기독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잘 못일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진품 예수로 믿는다면 먼저 우리 기독교 안에서부터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위로만 향한 기독교였다면 이제는 아래로 내려가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주변의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며 예수님처럼 기독교가 다시 한번 낮은 곳으로 향 한다면 겸손한 종교가 될 것이고 또한 세상을 다시금 변화 시키는 힘이 될 수 있을 깃이다
진품 예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사랑의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그의 전 생명은 사랑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하는 것은 그분의 지혜로움 날카로움 정의로움 평화 등이 있겠지만 누가 뭐래도 그분을 통해 만난 하나님의 진한 사랑 때문이다 그분에게 있어 진품 중의 진품 모습은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결코 말에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그분의 말 한마디와 움직임 하나하나가 사랑의 실천이었고 사랑의 수고 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랑에 놀라워하며 변해 갔던 것이다 그 예수님의 사랑은 짝퉁으로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이다
우리가 짝퉁 예수를 믿고 있는지 진품 예수를 믿고 있는지는 이 사랑의 실천 여부로 판가름 날 것이다 말로만 예수님을 전 하는 것은 우리가 진품 예수를 다시 한 번 짝퉁 예수로 만드는 것이다 그 사랑을 하나님께 표현하고 이웃과 나누는 삶에서 진품 예수의 사랑은 더욱 더 확연하게 다가올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예수의 믿음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이나 율법 학자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매우 못 마땅하게 여기었다 그래서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시험에 빠트리려고 노력 하였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유대 지도자들이 가졌던 전통과 계율에 대한 경직된 교리적 믿음을 볼 수 있다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참 믿음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만드신 본래의 뜻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은 계율 그 자체를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 믿음은 예수님에 관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신뢰와 신실함을 의미 한다
평소에 예수님과 신뢰와 친밀함을 갖지 않았던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기란 어렵다 교리적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닌 이유는 예수님과 나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지금 세상을 휘감고 있는 미움과 불의와 폭력과 반 인간적인 세상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요 평화의 군대이다
이런 특권과 소명을 동시에 받은 우리가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앞에는 겸손을 두르고 뒤에는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다보면 다시 한 번 세상을 변화 시키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