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5)
한운석 10.12.14 조회수140
5. 기독교가 성서에 바탕하여 가르쳐 온 용서는 그렇게 값싼 것도 아니고,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온전한 용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회개의 3R(Three R뭩 of Repentance)이라고 부르는데,
첫째가 Repentance(회개), 둘째가 Restitution(보상), 그리고 셋째가 Reformation(개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repentance이며,
자신이 끼친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보상하는 것이 restitution이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고치는 것이 reformation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온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박도섭이 신애를 만나기 전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그는 restitution에 대해 고민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박도섭으로서는 하고 싶어도 restitution을 할 방도가 없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이를 살려낼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도로라도 그는 신애의 상처의 치유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면회를 끝내고 나오면서, 종찬은,
박도섭의 얼굴이 죄인치고는 너무 좋아 보였다고 감탄을 합니다.
그걸 보니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박도섭이 받았다는 하나님의 용서가 가짜였음을 증명합니다.
그가 받은 은혜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의 얼굴이 그렇게 좋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아서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행한 죄로 인해 그 가족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고 함께 아파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신애에게 할 수 있는 restitution이었습니다.
신애가 찾아왔을 때, 그는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비통하게 무너졌어야 했습니다.
울어서 되는 거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울었어야 마땅했습니다.
박도섭은 죽을 때까지 신애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고백을 했지만,
그것은 마치 신애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말처럼 들리지 회개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핑계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가 참되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에 더 예민하고 적극적이야 하는 법인데,
실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손실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들먹이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요!
이 대목에 다다르니, 제가 한국에서 알고 지낸 어느 장로님 생각이 납니다.
그분이 어느 날 교통사고를 내어 초등학교 어린아이를 다치게 했습니다.
그분으로서는 보험 처리를 하고, 한 가족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하나님께 진실하게 회개하고,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될 수 있는 대로 손해를 덜 보기 위해서, 법적으로 꼭 해야만 하는 일만 최소한으로 하려고 힘씁니다. 그
분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그 아이가 퇴원할 때까지
거의 매일 퇴원하는 길에 병원에 들러 위로하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와 그 아이와 가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restitution입니다.
저는 그 장로님이 모든 면에서 완전한 분이라고 추켜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한 가지 사건에서 그 장로님은 참되게 회개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답게 행동했습니다. 그
장로님과 사고를 당한 가족은 그 과정에서 깊은 정이 들었고,
그 가족은 그 장로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한 마디 전도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6. 회개의 세 번째 요소 즉 reformation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실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고, 그 능력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할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자신을 고치는 일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천벌을 받을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다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찬양하기에 바쁩니다.
그러한 잘못이 자신에게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아니 그런 차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땅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새로움을 얻는 일로 결론지어져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읽은 다윗의 회개 시편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는 회개의 기도를 올리면서, 자신의 죄를 씻어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10절부터 12절에 나오는 기도에서 다윗의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다윗은 자신을 고치는 일은 자신의 노력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그의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해주시지 않는 한 그에게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자신이 다시는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새롭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십자가는 용서 자판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고치는 일없이,
동일한 잘못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그때마다 회개라는 동전을 넣어 용서라는 제품을 꺼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본성의 연약함을 생각한다면, 동
일한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지만, 우리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거듭거듭 새로워지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용서라는 물건을 내어 주는 자판기가 아니라,
죄로 물든 우리의 존재를 씻어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힘입고 살아가면, 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난날을 살아오면서, 알게 그리고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작게 혹은 크게,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얄궂게도 내가 입은 상처만 기억하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입힌 상처는 별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입은 상처보다 더 많은 상처,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살아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딱딱하게 만들어, 웬만한 잘못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행동하며, 내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일로 매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내 이웃만이 아니라
마침내 나 자신까지 불행하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혹,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용서의 교리를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여,
죄책감이 들 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림으로 양심에 위로를 삼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는 위로와 평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환각 상태에 빠진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같은 회개의 기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용서의 은혜를 얻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회개를 보고 역겨움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유일한, 참된 방안은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첫째,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진정한 용서를 선물로 받고,
둘째, 그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자신의 죄로 인해
이웃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며,
셋째, 성령의 은총으로 변화를 받도록 더욱 영적 생활에 힘쓰는 일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고,
그 은총과 축복은 우리를 환각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현실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치르게 만들어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날로 새로워져 갈 것입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우리의 회개와 용서를 보고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 회개, 그런 용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꿈꾸고
함께 갈망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오, 주님, 저희가 그 동안 갈구하고 또한 간증했던 회개와 용서가
박도섭의 것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환각적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희로 인해 주님께서 얼마나 욕을 당하셨습니까?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진실한 회개와 진실한 용서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희의 회개와 용서로 인해 주님께서 살아 계심이 증거 되게 하소서.
오, 주님, 참된 회개와 용서에 있어 저희를 능하게 하소서.
아멘.
글쓴이: 김영봉 목사, 와싱톤한인교회 VA 올린 날: 2007년 1월 1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