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6)
한운석 10.12.28 조회수114
"거울을 들어주라"
연속 설교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3 : 누가복음 15:11-24
1. 영화 <밀양>은 어느 모로 보든 남녀간의 러브스토리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포스터는 마치 러브스토리인양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에 "동그라미처럼, 그가 그녀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는 문구(카피)도 보이고,
"이런 사랑도 있다..."라는 문구도 보입니다.
신애의 남동생이 밀양 역전에서 "사장님은 누나 타입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종찬에게 던지고 가는데,
관객인 우리가 보아도 시골 노총각 종찬은 세련된 서울 색시 신애에게는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종찬은 늘 신애 옆을 맴돕니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사랑이 이야기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남녀간의 러브스토리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사람의 애정보다는 신애의 아픔과 치유 과정이 더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종찬이 신애에게 주고 있는 사랑의 성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애에 대한 종찬의 사랑은 왠지 연애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런 사랑과 달라 보입니다.
물론 종찬은 신애를 이성으로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사랑은 이성을 향한 정염을 훨씬 초월하는, 뭔가 더 순수하고 더 온전하며 더 차원 높은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물어봅니다. "왜 감독은 이 영화를 ?#47084;브스토리?#47196; 부각시키려고 했을까?"
열 사람이면 아홉은 "이건 러브스토리가 아니잖아?"라고 반문할 것이 뻔해 보이는데,
감독은 왜 굳이 러브스토리로 선전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성간의 사랑보다 더 근원적인 참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혹시,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든, 친구 사이의 사랑이든,
그 모든 사랑이 지향해야 할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진실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영화 포스터에 내세운 문구(카피),
즉 "이런 사랑도 있다"는 문구는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 혹시 이런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2. 종찬이라는 사람은 참 신기한 인물입니다. 그는 신애가 말하듯 속물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습니다. 카센터 사무실에 다방 여종업원을 불러 희롱하는 일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신애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가짜 상패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손수 피아노학원 벽에 걸어줍니다.
신애가 "이게 뭐예요?"라고 묻자 종찬은 "이런 것쯤 하나 걸려 있어야 소문이 쫙 나가지고,
아이들이 많이 찾아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신애를 따라 교회에 나간 다음에 종찬이 하는 행동은 더 재미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마자 종찬은 주차 안내를 자원합니다.
원래 교회 봉사는 이렇게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잘 하는 법입니다.
어느 날 엉터리로 주차해 놓은 차를 보고는 쩔쩔 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깔은 터져 나오고, 교회 앞이니 그 성깔대로 하지는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쌍시옷이 터져 나옵니다. 다른 데 같았으면 차를 몇 번 걷어찼을 텐데,
지나가는 교인들 눈을 의식하고는 몸만 비비꼽니다.
그러다가 아는 선배가 와서 차를 몰고 사라지자,
"언제, 소주 한 잔 사 주실랍니까?"라고 인사말을 던집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애가 밀양 역전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는 전도대에 참여하자
종찬도 거기에 가세합니다. 술친구들이 찾아와 그 모습을 보고 조롱을 하는데,
종찬은 아무 개념 없이 친구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담배, 이기, 왜 이리 맛있나? 오늘따라 억수로 맛있네!"라고 말합니다.
신애가 하나님께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동안에도 종찬은 꾸준히 교회에 다닙니다.
잠시 누나를 보러 내려왔던 신애의 남동생이 차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고,
"아직도 교회에 나가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때 종찬이 하는 말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이렇듯 종찬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특별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도덕적 관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밀양으로 들어오는 차안에서 신애가 "밀양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 아세요?"라고 묻자,
종찬은 "뜻예? 어디 우리가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예!"라고 답하는데,
그것이 종찬의 인생관처럼 느껴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니, 구원의 확신이니, 제자도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의 습관적입니다.
3.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쁘게 보려 해도, 종찬이 미워 보이질 않는 겁니다.
종찬이 걸어준 가짜 상패를 모른 척 그대로 걸어두고 있는 신애의 내숭은 얄미워 보이는데,
가짜 상패를 걸어주고 있는 종찬은 미워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아픔에 함부로 끼여들며 "신애 씨 같은 불행한 사람은?이라고 말하는 약국 김 집사의 행동은
우리를 낯뜨겁게 만들고, 신애의 유혹에 부질없이 넘어가는 약국의 강 장로도 우리를 고발하는 것 같은데,
종찬의 행동은 가식이라거나 허위라거나 위선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여워 보일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에게 더 좋은 대답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종찬의 정직함과 순진함과 진실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종찬은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느끼는 것,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진실했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볼 꿈도 꾸지 않습니다.
신애가 자신을 향해 속물이라고 쏘아붙여도 저항하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속물이면 어떠냐는 식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입니다.
남들 앞에서 "하나님 믿는 것이 꼭 연애하는 기분이에요"라고
달뜬 표정으로 전도하는 신애의 가식과는 달리, 종찬은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솔직합니다.
이 같은 투명성(transparency), 정직성, 순진성, 그리고 진실성이 종찬을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종찬의 모습이 이상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보아도 종찬에게는 좀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합니다.
도덕관념도 좀 생겼으면 좋겠고, 교회에 나가는 이유도 점점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져가면서, 다방 아가씨에게 희롱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도 느꼈으면 좋겠고,
쌍시옷 언어들을 점점 어색하게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종찬은 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럽습니다.
도무지 연극할 줄을 모르는 사람, 꾸밈과 가식이 없는 사람,
자신의 무식과 교양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생긴 모습대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종찬은 항상 신애 옆에 혹은 뒷자리에 서 있는데,
그것이 마치 연극에 빠져 살고 있는 신애와
현실에서 살고 있는 종찬을 대비해주려는 의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또 하나 종찬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그의 일관된 헌신과 사랑 때문입니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일관된 사랑에는 어떤 불순한 의도가 없습니다. 계산도 없습니다.
사실, 종찬이 신애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연애 기술에 있어서 낙제생에 속하는 제가 보더라도
참 딱해 보입니다.
4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노총각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뻔히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 없이, 아무런 전략도 없이, 그냥 무조건 주변에서 맴도는 것만으로
한 여인의 마음을 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종찬은, 아무리 밀어내고 외면해도, 배알도 없는 사람처럼
또 다시 헤헤거리며 신애 앞에 나타납니다.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를 표방하는데 결코 러브스토리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싶습니다.
종찬의 사랑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바치는 이성적 사랑치고는 특별합니다.
그의 사랑의 목적은 신애를 품에 안는 것을 넘어 서 있습니다.
신애가 행복해지는 것, 오직 그것에만 있습니다. 만일 신애가 다른 남자를 만나 좋아지게 되면,
그리고 종찬이 보더라도 그 남자가 자신보다 더 나은 남자인 것처럼 보이면,
그는 아쉽지만 물러서서 "행복하게 사시지예!"라고 말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4. 이 영화에서 참된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교회 목사도 아니고,
전도의 열심으로 충만한 약국 김 집사도 아닙니다. 도덕관념도 희박하고,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종찬,
바로 그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그 한 모델을 보여줍니다.
종찬이 보여주는 사랑은 아무 조건 없이, 그 어떤 일에도 굴함이 없이, 일관되게, 계산 없이,
오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동시에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의지와 감정을 존중하며,
그가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랑입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종찬은 신애와 늘 어느 정도의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종찬은 신애에게 무엇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하게 내버려둡니다.
그 모습을 두고 지켜보다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가까이 다가갑니다.
마음 같아서는 신애의 영역으로 넘어가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줄을 압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돕는 것도 아님을 압니다.
그 거리를 유지하고 기다리는 것으로 인해 애간장이 탑니다만,
언제나 그 거리를 유지하며 신애 곁을 맴돕니다.
종찬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종찬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는 동안, 제게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기보다는 어리석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정서를 감안해 보면,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버지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설득하다가 지쳤는지, 둘째 아들 몫의 유산을 떼어줍니다.
그 아들은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거지가 되어버립니다.
그때 이 아들은 제정신이 들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
아버지께 돌아가서 사죄라도 하고 죽자"라는 심정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탕자가 생각했던 worst scenario는 아버지에게 맞아죽는 것이고,
best scenario는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오고 있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반겨 맞아줍니다.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도대체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옛날 아버지들 같았으면, 유산을 나눠주지도 않고 내쫓았을 것이며,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는 작대기를 들고 달려가 쫓아버렸을 것입니다.
아들을 쫓아 보내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면사무소로 가서
아들을 호적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아버지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매우 어리석은 아버지상을 이 비유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일관되어 변함이 없고, 기다릴 줄 알며,
간섭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행하도록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타락하고 실패하는 것까지도 참아가면서 지켜보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성숙하고 자라고 회복되기까지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때로 받은 상처로 인해 고통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며 그 고통의 기간을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