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8)
한운석 11.03.07 조회수 98
영화관에 가신 예수
2007.11.25 (김영봉 목사)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4
“밀양으로 가라”--마태복음 6:5-6
1.
영화 <밀양>을 보기 전까지,
경상남도 밀양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은 ‘밀양 아리랑’과 유서깊은 사찰 표충사 정도였습니다.
저에게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밀양이라는 도시는 광주나 여수 혹은 마산 같은 상징성 높은 도시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뭔가가 느껴지는 그런 지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밀양의 역사나 전통이나 지역 정서가 이 영화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밀양이 고향인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좀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제목을 보고, ‘한 두 가지라도 우리 고향의 자랑거리가 소개 되었으면……’하는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 영화의 제목을 <밀양>이라고 붙였을까요?
그 이유는 밀양이라는 도시의 ‘평범성’과 밀양이라는 지명의 의미 때문입니다.
밀양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신애와 종찬이 나눈 대화와, 영화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종찬과 신애의 남동생이 나눈 대화는, 감독이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두 장면을 연속해서 보시겠습니다.
첫 장면 5:30-6:54두 번째 장면 2:09:16-2:10:00
밀양 토박이인 종찬에 의하면, 밀양은 다른 곳과 별로 다를 것 없는 곳입니다.
“밀양이 어떤 곳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별스럽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신애는 ‘밀양’이라는 지명이 심상치 않다고 느낍니다. ‘비밀 밀’(密) 자와 ‘햇볕 양’(陽) 자를 합쳐 만든 이 지명은 ‘비밀 햇볕’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지역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곳, 그렇지만 비밀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을 주는 곳, 그곳이 밀양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밀양’이라는 지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좀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어느 향토 학자에 의하면, ‘밀양’이라는 지명은 ‘밋양’에서 진화된 것이고, ‘밋양’은 ‘미의 양’이라는 말에서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미의 양’에서 ‘미’는 물을 뜻하고, ‘양’은 북쪽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밀양이라는 지명은 ‘물의 북쪽’이라는 뜻입니다. 밀양에는 ‘밀양강’이라는 강이 흐르는데, 옛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이 강을 ‘남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양은 ‘강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이 추론이 맞는다면, 감독은 확실히 ‘밀양’이라는 지명의 원래 의미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음에 분명합니다.
밀양의 역사, 유래, 전통, 정서 등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밀양이 다른 여늬 도시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과, 감독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만을 붙들고 있습니다.
2.
이 영화에서 햇볕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자동차 안에서 보이는 하늘의 모습을 15초 동안 비추어 줌으로써 시작합니다.
영화에서 15초면 매우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햇볕은 환한 햇볕, 드러난 햇볕,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햇볕입니다.
신애는 바로 그 강렬한 햇볕을 찾아서 밀양으로 온 것인지 모릅니다.
구차한 자신의 삶에 햇볕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햇볕이 강한 도시로 찾아 왔는지 모릅니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쨍 하고 해 뜰 날’이 오기를 열망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신애의 이 기대감은 처참하게 깨어집니다.
자신의 삶에 햇볕이 깃들기를 바라고 밀양으로 찾아왔는데, 오히려 어둠만이 더 깊어졌습니다.
아들 준을 잃고 살아가는 신애의 삶은 말 그대로 짙은 어둠입니다.
아들을 잃은 뒤에 집에 홀로 있는 신애는 언제나 짙은 어둠에 둘려 있습니다.
햇볕이 특별히 밝은 밀양이기에 신애의 어둠은 더욱 짙어 보입니다.
신애는 그 어둠을 벗어나고 싶어서 교회를 찾습니다.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는 그 햇볕을 잡았다 싶었습니다.
밀양으로 찾아들면서 막연히 기대했던 그 햇볕을, 믿음을 통해서 잡았다 싶었습니다.
그 햇볕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금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햇볕이 자신에게 깃들었다고, 행복한 표정으로 간증하고 다닙니다.
사실은 어둠 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짐짓 햇볕을 받고 밝은 대낮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연극을 합니다. 그렇게 연극을 하다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을 견디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애는 아들을 죽인 범인 박도섭과을 면회하고 나서, 자신이 잡았다고 생각했던 그 햇볕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신애가 자초한 일입니다만, 신애는 그것을 햇볕의 배신 즉 하나님의 배신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로부터 신애는 하늘과의 투쟁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에 몰입합니다.
어차피 자신의 어둠을 벗어날 수 없다면, 어둠의 세력과 합하여 싸워 보겠다는 심산입니다.
어둠으로써 빛을 이겨 보겠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점점 거세지더니, 신애는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끊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합니다.
팔목의 혈관을 끊고 터질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보여, 보이냐구!”라고 울부짖는 신애의 몸부림은 하나님께 대한 최후의 결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싸움에서 신애는 제풀에 지쳐 항복하고 맙니다.
고통을 참다 못해 밖으로 뛰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살려 주세요”라고 사정하는 신애의 절규는,
마치 하나님께 대한 호소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제가 졌습니다. 이제 싸움을 포기합니다.
그러니 저를 한 번만 도와 주세요. 이제는 모른체 할께요”라고 말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신애는 정신병원을 다녀 오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립니다. 그 동안 연출하고 연기해 오던 연극을 끝내고, 현실로 내려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사진이 붙어있는 거울을 앞에 놓고도 담담히 자신의 얼굴을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주는 여운을 곱씹다 보니, 아무런 행운도 보장하지 않는 밀양을 신애가 이제는 진실로 사랑할 것처럼 보이고, 속물처럼 보이기만 했던 종찬을 결국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처럼 보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내려 오니, 이렇게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이 영화의 제목을 ‘밀양’이라고 붙인 이유를 잘 보여 줍니다.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2:17:00-2:19:13
거울을 앞에 두고 앉은 신애의 모습은 서정주 시인의 그 유명한 시, ‘국화 옆에서’라는 시의 한 구절,
즉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신애는 남편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 사망 후에 알게 된 남편의 외도로 인해 받은 배신감과 절망감, 밀양에서의 가슴 부푼 새출발, 그 꿈을 산산히 깨뜨려 버린 아들의 유괴와 살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했던 하나님과의 행복한 만남 그리고 그 희망을 짓밟아버린 하나님으로부터의 배신, 그리고 하나님과의 긴장감 어린 투쟁을 거쳐, 많이 지친 모습으로, 하지만 삶의 우여곡절에서 어느 정도 초연한 사람처럼, 거울 앞에 앉아 가을 국화처럼 하늘거리고 있습니다
.
그렇게 거울 앞에 앉은 신애의 등 뒤에서 내려쪼이는 햇볕은 신애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어 줍니다.
그 빛은 ‘비밀 햇볕’입니다. 영화가 시작될 때 차창 안에서 보던 그 밝고 눈부시고 강렬한 햇볕이 아닙니다.
하늘 가득히, 눈이 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볕이 아니라, 비스듬히 비추는 엷은 햇볕입니다.
신애가 밀양으로 이사할 때 마음 속으로 갈망했던 그 ‘비밀 햇볕’이 이제야 신애에게 깃듭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신애가 ‘비밀 햇볕’을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비밀 햇볕’, 빗물에 밀려온 오물과 찌그러진 약품 통이 버려져 있는, 낮고 추하고 더러운 곳을 은밀하게 비추는 햇볕?바로 이것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려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우리 인생에 “쨍 하고 해 뜰 날”을 기다리지만, 그 햇볕은 어쩌다가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깃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늘 비추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햇볕은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곳, 오히려 낮고 추하고 더러운 곳을 더 빽빽히 비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햇볕은 우리를 꿈 같은 세상에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태롭고 초라하고 힘겨운 현실을 끌어 안도록 해 준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햇볕은 우리가 열렬히 추구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머물러 기다릴 때,
우리에게 깃든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참된 구원을 찾는다면, 비밀 햇볕을 찾아 밀양으로 내려가라.” 참된 구원을 주시는 비밀 햇볕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밀양, 썰렁하고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은 신애의 집,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본, 햇볕이 내려 쪼이는 하수구는 우리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초라한 현실을 대면하고 끌어안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어깨에 내려 앉아 따뜻하게 덥혀 주는 비밀 햇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 주시는 세 가지 말씀 중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영적 생활의 방법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이 세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구제하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했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싶어 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면서, 예수님은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혹은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혁명적인 신관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숨어계시다니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숨박꼭질을 하고 계시다는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일부러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그분은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육적인 존재로서 물질에만 익숙해 있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분은 숨어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숨어계시는 분’ 혹은 ‘은밀하게 계시는 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숨어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바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비밀 햇볕’의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은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햇볕처럼 일하시기보다는 신애의 등 뒤에서 비추는 비밀 햇볕 같이 일하시는 분입니다.
조용히 머물러 있을 때, 등 뒤로 와서 우리의 어깨를 따뜻하게 비추시며 감싸시는 분입니다.
격렬하게, 뜨겁게, 극적으로, 찬란하게, 눈부시게, 화려하게, 결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화하게, 따뜻하게, 드러나지 않게, 차분하게, 눈에 뜨이지 않게,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은 현실을 탈피하여 꿈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별세계를 지어놓고 그곳으로 도피하려는 잘못을 범하곤 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행동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과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은 천국만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에서 도피하거나, 이 땅에 우리들만의 천국을 지어놓고 살아가거나, 환각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 현실에 임하는 비밀 햇볕의 힘을 발견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초라하고 권태롭고 절망적인 현실을 역전시키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요 17:1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현실로 들어가 그 현실을 천국으로 바꾸는 데 있지, 현실을 떠나 천국으로 도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4.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신애가 하나님과 투쟁하는 중에 어느 공원에서 열리고 있던 부흥 집회를 방해하는 장면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보면 아주 고소해 할 장면이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면 아주 쓰디쓴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1:45:26-1:48:30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노래가 들립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 이 노래는 마치, 하나님도 거짓말, 성경도 거짓말, 구원도 거짓말, 사랑도 거짓말, 교회도 거짓말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기도 중에 이 노래가 들리자,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소음이려니 생각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기도를 계속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노래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 다 거짓말이라는 뜻인가?”라는 표정을 짓습니다.어떤 사람은 사탄의 유혹이다 싶은지, 목소리를 크게 높여 기도 함으로 노래 소리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이 장면이 제게는, 믿는 사람들이 끊임 없이 듣게 되는 내면의 소리를 상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숨어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분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 5:7).
그런데 우리는 육신을 입고 물질 세계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또한 그 본질이 ‘미혹하는 자’인 악한 영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기회를 노립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 마음에서는 늘 김추자씨의 이 노래가 들립니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목사에게도, 헌신과 희생으로 단련된 장로님에게도, 기도를 많이 하시는 권사님에게도,
최근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가슴이 따뜻한 집사님에게도, 얼마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초신자에게도, 그리고 이제 막 하나님을 믿어볼까 저울질하고 있는 구도자에게도, 이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그냥 소음이겠거니 하고 무시하고 지날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그 노래 소리에 솔깃해지기도 합니다.
“거짓말이 아닐까?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짜일까?” 신애가 말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조차도 다 믿지 않는” 우리이기에
이 노래 소리에 때로 솔깃해 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