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최종)
한운석 11.03.07 조회수 137
5.
이 대목에서 두 사람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은, 얼마 전 사적인 편지들이 공개되어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입니다. 그의 편지를 묶은 책 <Come Be My Light>을 보면, 숨어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강렬한 믿음을 읽을 수 있는 한 편,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번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신부님, 49세 혹은 50세쯤부터 이 고통스러운 상실감, 말할 수 없는 이 어둠, 이 고독감, 하나님께 대한 이 지속적인 갈망, 이것이 제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을 주어 왔습니다. 어둠이란 제가 진실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으로도, 제 이성으로도. 제 영혼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갈망으로 인한 고통은 그렇게도 깊은데, 저는 그저 바라고 또 바랄뿐, 그것이 제가 느끼는 전부이고, 그분은 저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자주, 제 마음이 ‘내 하나님’하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아무 응답도 오지 않습니다. 제가 말로 묘사할 수 없는 고문과 고통만이......”
또 한 사람은 20세기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라고 불리는 C. S. Lewis입니다.
그는 오래도록 신봉하고 있던 무신론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고전 외에, 심오한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독신으로 살던 Lewis는 늦은 나이에 조이(Joy)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Lewis를 만나기 전부터 조이는 암과 투병하고 있었는데, Lewi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감행하고 몇 년간 행복하게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었던 Lewis는 아내를 치료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으로서는 손을 써 볼 수도 없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보내고 난 후, 그는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Lewis는 한 동안 자신을 짓눌러 온 하나님께 대한 의문에 대해 이렇게 술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꽝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 누가 살고 있기나 했던가? 한 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 때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정말로 빈집 같다.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6.
20세기의 성자라고 추앙받던 캘커타의 테레사도,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꼽히는 C. S. Lewis도,
때때로 내면에서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혹은 믿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이 노래가 들리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조건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숨어계시는 분’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밀 햇볕’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하자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비밀 햇볕이요,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과연 비밀스럽다고 하여 햇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숨어계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마지막으로 한 장면을 더 보고 싶습니다. 신애가 약국 김집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1:01:50-1:04:05
김집사가 햇빛이 은밀히 깃드는 곳을 가리키며, “저 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있어예”라고 말하자,
신애가 그곳으로 걸어가서 대답합니다.
“여기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그냥 햇빛이에요, 햇빛.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곳에 비밀 햇볕이 깃들어 내려 쪼이고 있는데, 신애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그 동안 그토록 갈망해 왔던 비밀 햇볕이 그곳에 있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밀 햇볕은 이렇듯 알아차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비밀 햇볕을 온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할 때, 그 사람을 설득시킬 방도가 마땅치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비를 주신다”(마 5:45). 비밀 햇볕과 같은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아니,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을 감싸고 계시며, 비추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을 온 몸으로 받고 살아가면서도,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하느냐?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마땅한 방도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도 신애처럼 거울 앞에 머물러 앉아 따사로운 하나님의 햇볕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예수께서 드러내신 그 하나님, 숨어계신 하나님, 낮은 데로 임하시는 하나님,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나 조용히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존재를 감싸시는 하나님, 우리를 환각과 환상 속으로 도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 안으로 들어가 대면하고 끌어안아 그 현실을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때로 의문도 생기고 의심도 생기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십시다.
숨어계신 것처럼 보이는 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햇볕이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 쪼이고 있습니다.
그분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우리의 현실을 끌어 안고 살아가십시다. 분명, 그 비밀 햇볕은 우리의 삶을, 밑으로부터, 속에서부터, 표시나지 않게, 조금씩 그러나 틀림없이, 바꾸어 줄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이 하나님을 믿기에 주저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신애처럼,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은총을 힘입어 오늘까지 살아 왔으면서도, “아무 것도 없다. 신(神)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 거짓말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보실 때는 하나님을 믿는 저같은 사람이 속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만, 정말 누가 속고 있는 것인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햇빛처럼 너무나도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에 없는 것처럼 보이고,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뿐입니다.
신애처럼, 거울 앞에 물러 앉아, 문득 은밀하게 어깨 위를 내려 쪼이는 햇볕의 온기를 느끼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려 태양의 존재에 눈을 뜨는 것같은 은총의 순간이 여러분에게 속히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낮은 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존재를 내려 쪼이고 계신 하나님,저희 존재를 주님 앞에 엽니다.
저희도 조용히 거울 앞에 서게 도와 주소서.저희도 조용히 머물러 앉아 주님을 기다리게 도와 주소서.
거짓말 같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감으로거짓말 같은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거짓말처럼 들리는 믿음의 길에서 완주하여진짜같아 보였던 모든 것이 소멸할 때
거짓말 같아 보였던 영원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