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뱅주의
한국교회 타락의 핵심은 한국 개신교가 양립하기 힘든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멋대로 짬뽕한 ‘아르뱅주의’에 있다.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1509∼1564)이 창시한 칼뱅주의와 그 손제자격인
네덜란드 출신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가 창시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400년 넘게 대립하고 있다.
한때 패배하는 듯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18세기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신학자 존 웨슬리(1703∼1791)를 만나면서 부흥했다.핵심은 구원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장로교와 뿌리가 닿는 칼뱅주의는 내가 구원을 받을지 말지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미리 정해놨다는 예정론을 토대로 신학을 전개한다.
내가 기독교도가 되느냐 마느냐도 예정된 것이다.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 수 없다.
다만 신실한 신앙생활(내적 증거)과 도덕적 실천(외적 증거)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칼뱅주의자들이 도덕적 삶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이유다.
반면 감리교의 뿌리격인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정설을 부인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미리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부인하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구원받을지 아닐지를 예지로 알고는 있지만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접만 하면 구원이 가능한가? 아니다.
언제든 타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회개와 보속이 필요하다.불교로 치면 칼뱅주의는 돈오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점수론이다.
성리학으로 보면 칼뱅주의는 주리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주기론이다.
조선의 당색으로 치면 칼뱅주의는 벽파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시파다.
문제는 한국 개신교가 편의에 따라 이 둘을 뒤섞은 ‘폭탄주 신학’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
자신들이 하나님을 영접했으니 구원받았다는 주장을 할 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내세우다가 자신들의 윤리문제가 불거지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뱅주의로 내뺀다.
남의 신앙엔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신의 신앙엔 칼뱅주의를 적용하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정체불명의 팔자주문만 외워댄다는 것이다.
“목사라고 하는 자들이 간통을 하고, 논문을 위조하고, 여신도들을 성추행하고, 불법으로 세습하고, 교회의 재정을 제멋대로 유용하고, 배임하더라도, 그러한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택받았으니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기꺼이 가져다 쓴다.”
“아르뱅주의는 구원의 길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으면 이를 가차 없이
제거하여 가급적 쉬운 길로 만들어버린다.
즉, 아르뱅주의자들은 선택자들에게만 구원의 문이 제한적으로 열려 있다는 칼뱅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기꺼이 선택한다.
”저자는 이런 아르뱅주의가 개신교가 그토록 증오했던 ‘면죄부’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개신교의 정신을 배반하고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을 ‘값싼 구원’으로 팔아넘긴다는 것이다. 어떤가.
드라마 속 정도전이 고려 권문귀족을 향해 토해내는 사자후를 조선후기 사대부들에게 고스란히 적용해도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는 것과 너무도 닮지 않았는가.
(천하무적 아르벵주의 -신광은 목사 저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