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모이고 싶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는다
‘어떻게 하면 모일 수 있을까?’이것이 교회의 당연한 고민이어야 한다. 왜 이것이 당연한 고민인가? 성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며,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일주일에 몇 번을 볼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정상이다. 만남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주일에 몇 번을 보아야 괜찮은 걸까?’라고 고민한다면, 이미 그 만남은 ‘사랑’이 아닌 ‘의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사랑하면 ‘방법’을 찾게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유를 찾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는다고 한다. 초대교회가 ‘날마다’모였던 것은 당시가 오늘날보다 할 일이 없고 덜 바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모이는 것이 곧 유대 사회에서의 분리를 의미했다. 비난과 비판을 받고 무고한 누명을 써야 함은 물론 목숨을 내놓아야 함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모이기를 권하고 힘써 모이며 가능한 날마다 모이려했다. 낮에 드러내놓고 모이지 못하면 밤에 몰래 모였고, 광장에서 모이지 못하면 기꺼이 영원한 세상에서의 모임을 위해 ‘순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덕균, “사랑하면 모이고 싶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는다” 「목회와 신학」2018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