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삶의 현장에서는 불신자들과 구별되지 않을까?
예배시간에는 모두 거룩해 보이고 교회에서는 모두 천사 같은데 왜 삶의 현장에서는 불신자들과 구별되지 않을까? 각종 봉사 모임에도 잘 참석하고 기도도 은혜롭게 잘 하는데 왜 삶의 현장인 가정, 직장, 동네에서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까?
성경도 잘 읽고 제자훈련도 했는데 왜 성경이, 훈련이, 중요한 결정적인 때에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 한국사회에 대형사건이 터지면 거의 예외 없이 그 중심에 기독교인이 포함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인의 도덕지수, 청렴지수는 왜 자꾸 떨어지는가? 한국교회 안에서 행하는 수많은 성경공부, 제자훈련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수많은 예배는 삶과 아무 관계가 없어도 되는 것인가? 예배는 자주 많을수록 좋은가? 신앙이 좋다는 말의 참 뜻은 무엇인가?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예배, 제자훈련, 성경공부가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목회 초년병 시절부터 이런 의문들이 필자를 계속 힘들게 했다. 이런 의문들을 고뇌하며 세 가지 해결 실마리를 찾았다. 첫째, 인간의 98% 정도는 권력 지향적이다. 둘째, 대부분의 교회에서 평신도들은 수동적이고 목회 보조적이며 목회자들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고 아주 단순한 일만 처리한다. 그것도 극히 작은 수만 가능하다. 셋째, 이 세상에 달란트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각자의 재능을 잘 활용한다면 누구나 신나게 살 수 있고 세계적인 사람도 될 수 있으며 신앙생활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중요하다. 교회 안의 평신도들도 자신이 잘 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자신의 은사만 발견하고 사용하면 잘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안돼서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다. 일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림이 잘하는 것도 싫고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 그러니 사소한 일로도 다투고 갈라서는 것이다.
<정우겸, “재능과 은사에 맞는 전교인 봉사자를 세우다” 「목회와 신학」2015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