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교회의 2100억 교회건축
가브리엘 10.01.06 조회수 208
사랑의 교회가 2100억원을 들여서 추진하려는 교회건축에 대한
의식있는 기독교인들의 우려가 높습니다.
아래 글들은 그중에사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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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신앙
바벨탑을 짓는 동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높은 건물을 지어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흩어지지 말자였다. 흩어지면 힘이 약해지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숫자를 모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어 버리셨다. 모아서 힘을 결집하고 그 이름을 내려는 이들의 모든 시도를 하나님께서는 무산시키셨다.
흩어지는 것이 교회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여 있으려고 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사랑의교회 관계자들은 주일에 수많은 인파가 이동하고 움직이느라 사고의 위험이 있고 주차 문제가 있다는 점도 거론한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말들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주일 하루의 문제일 뿐이다. 교회의 건물은 대개의 경우 주일 하루를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의 삶은 엿새 동안의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주일 하루를 위한 건물을 짓고 또 짓고 더 크게 더 높게 더 넓게 짓는다. 여기에서 주중의 삶보다 주일 하루의 삶을 더 중히 여기는 사고가 있다. 물론 주중에도 교회 공간이 활용되지만, 또 다른 예배 또 다른 성경 공부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용기 있고 담대하게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주일의 모임인데, 교회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교회로 나오도록 요구한다. 싸움터는 세상인데, 자꾸 교회로 피신하게 하고 교회로 도망치게 한다. 세상에서 무기력할수록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 더 은혜롭고 영원히 그렇게 찬양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그래서 주일이 중심이 된 예배당 건물 확장은 엿새 동안의 삶보다 주일 하루를 더 중히 여기는 사고와 연관된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의 제자이다.
좁아서 건물을 늘리겠다는 데에 교계 여기저기에서 발언하고 포럼이 열리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사랑의교회 교인들이나 관계자들로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건축을 위해 만들어진 홈페이지를 보면 볼수록, 이것은 단지 건물의 확장에 그치지 않고 이제까지 우리네 교회의 목표와 그토록 성행하던 제자 훈련 전체가 결부되어 있는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단지 현 담임목사님께 대한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그렇게 강조하셨고 모두들 큰 인상과 도전을 받았던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 훈련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미 한국 사회 내에서 교회는 그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이다. 다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몸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의교회를 향해 간절히 당부하며 외칠 뿐이다. 부디 흩어지시길. 그렇게 모이려고만 들지 말고 흩어져서 일상으로 들어가시길. 우리네 가난한 이웃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믿음과 기도로 맞붙어 나가시길. 그래서 오늘의 시대를 사는 제자가 무엇인지, 무엇이 헌신된 평신도인지를 보여 주고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는 사랑의교회이기를 간절히 요청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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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건축이 연 판도라 상자
갈리아를 정복한 줄리어스 시저는 기필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는 주사위를 던지며 한판의 도박처럼 자신의 조국 로마를 향해 진격했다. 역사가들은 시저의 도박으로 500여 년 로마 민주 공화정 역사는 종결되고, 독재정치의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고 평가한다. 이로 인한 독재적 전제정치는 기독교사적으로는 네로로 대표되는 초대교회 300여 년간의 엄청난 박해와 죽음의 역사로 이어졌다.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가 루비콘 강을 건너고 있다. 사랑의교회가 주저 없이 행하고 있는 2,100억짜리 도박판은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교회사는 어떤 평가를 할 것인가?
일개 교회의 건축에 대해 너무 거창한 언사를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이 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교회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이는 한국교회 125년 역사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사랑의교회는 크기나 숫자로 볼 때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갱신 운동, 제자 훈련, 기독교 세계관 운동, 개혁적 복음주의 그룹에서는 사랑의교회 스스로나 외부적 평가에 있어서나 가장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현교회가 80년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00억대 건축을 시행한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 광림교회, 금란교회, 영락교회 등 한국을 대표한다는 기라성 같은 교회들의 70, 80년대 수백억대 건축 경쟁을 촉발시켰다. 사실 이런 교회들이 지금 다시 건축을 한다고 해도 놀랄 일도 아니다. 연세중앙교회가 한적한 온수동에 체육관 같은 교회를 지었을 때도, 할렐루야교회가 우주 비행선 같은 800억 건축을 했다고 했을 때도, 아니 명성교회가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형 교회를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러려니 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부흥 운동과 사회 문화적 성장에 맞물려 급성장한 교회들은 이미 2,000년대 들어오면서 시작된 세습을 통해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교권을 거머쥔 특정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수백억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던 충현교회는 99년 세습이라는 판도라를 열었다. 이는 은퇴를 앞두고 고민하던 1세대 목회자들에게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다. 광림교회, 소망교회, CCC 등으로 유행처럼 번져 간 세습은 경향교회, 금란교회, 임마누엘교회 등 크고 작은 교회로 번져 갔고, 이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교회의 세습은 당연한 것 같은 착시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돈과 권력을 가진 대형 교회들이 목회자에 의해 공산주의적인 독재를 행하고, 어느 기업 못지않게 파렴치한 개 교회 성장주의를 지향할 때 모든 대형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자위하며 위안을 삼는 곳이 사랑의 교회였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기치 아래 학생 선교 단체에서 시행하던 제자 훈련을 교회 구역 모임에 접목하고, 80년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실행처로, 부패하고 타락한 교권에 도전하며 교회 갱신 그룹을 이끄는 이 시대 복음적 지성과 개혁적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사랑의교회는 개혁적 복음주의 그룹에 희망이 되었다.
재정적으로 기댈 곳 없는 고만고만한 단체들에게 사랑의교회는 부끄럽지 않게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고, 수많은 활동가와 회원을 양산하는 못자리판이었다. 모두들 동네 작은 교회 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할 때 사랑의교회 다닌다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정체성을 인정받았다. 사랑의교회에 대한 이런 저런 소식은 마치 전설처럼, 신화처럼 회자되었고, 낮음과 비움으로의 향함은 무한한 신뢰와 자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교회가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해 2,100억 원짜리 교회를 건축하는 도박을 감행하면서 "개 교회 문제이니 상관하지 말라, 큰 교회가 큰일을 한다. 강남의 지도층 인사들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공동의회를 시행하면 이런저런 말이 있어 하지 않았다. 95%가 건축 헌금에 동의했으니 95%가 찬성한 것이다." 이런 식의 원칙도, 상식도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니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심지어 오정현 목사는 예배 시간에 건축을 반대하는 글을 쓴 한 청년의 블로그에 대해 백기사 운운하며 사이버 테러를 조장하고, 이를 시행한 성도들에 의해 그 청년은 절필을 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제자 훈련 받은 깨어 있는 평신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는 없고 담임목사의 일방적 추종자들만 있는 것인가? 오정현 목사가 안수집사회 모임에서, 외부에서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 동지들만 믿고 따라와 준다면 개의치 않고 성전 건축을 완성할 것이라고 했다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예배당을 성전 운운한다던가, 건축 헌금을 작정한 날을 할렐루야 주일로 부른다느니, 정말 이 교회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교회 갱신 운동을 이끌던 그 교회가 맞나 싶어 너무나 황당할 따름이다.
사랑의교회는 이제 주사위가 던져졌다고 선언하며 루비콘 강을 건너는 줄리어스 시저와 같이 보란 듯이 건축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있다. 교회사는 사랑의교회 건축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 제자 훈련, 교회 갱신 운동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기록할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따라 제자 훈련하며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고 교회 갱신 운동에 뛰어든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70, 80년대 근본주의적 부흥 운동을 통해 성장한 대형 교회들과 같이 큰 교회 짓고 큰일 하는 것이라는 현실에 직면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앞 다투어 사랑의교회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 크기 경쟁에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 세련된 부흥사가 되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며, 돈과 권력과 명예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중세 교황청이 성베드로성당을 지으며 영광의 신학, 번영의 신학을 설파했던 것에 맞서 십자가의 신학, 고난의 신학, 약함의 신학으로 나아갔던 개혁적 기독교의 역사는 한국에서 사랑의교회 2,100억 원 건축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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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교회
지난번 사랑의교회가 서초고 자리에 비슷한 거금을 들여 건축하려던 계획은 무시할 수 없는 반대에 부딪쳐 무산됩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지난 <디사이플>지 11월 호 기고를 통해 사랑의교회 분립을 언급하면서 "제자 훈련하는 교회가 분수에 지나친 성장의 덧에 걸려 결과적으로 허약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라고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그런 옥한흠 목사님이 왜 이번 건축에는 30년을 일관되게 실천하신 것과 정반대라고 들릴 2,100억의 무리한 건축에 찬성하는 동영상을 올리셨을까요?
서초고 때와는 달리 오정현 목사는 제직들에게 자신을 믿어 달라고만 하고 대다수가 제대로 검토할 겨를도 없는 사이에 계약부터 잔금까지 모두를 보름 정도 안에 급하게 마쳐 버립니다. 그래서 이미 결정된 대출 이자 비용이나 1,200억 토지 비용 덩어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건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제는 이 큰 덩어리를 뱉어 낼 방법이 없기에 고통스럽더라도 삼켜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뱉어 내려다가는 죽게 되는, 즉 교회가 죽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옥한흠 목사님이 동영상에 참여하게 된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들 합니다.
2,100억은 이자만 5%로 잡아도 원금 외에 매년 100억 이상 나오게 되는 금액입니다. 거기에 두 군데 건물 유지 비용을 추가하면 그 2배에 가까운 큰 비용이 헌금에서 사용될 겁니다. 이는 건물 유지 관리를 위해서 돌이킬 수 없이 지출이 계속되는 고정비용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이런 상황에서 감동스런 영혼 사랑의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을까요? 다시 한 영혼을 살리는 제자 훈련의 정신을 살려 낼 수 있을까요? 평신도를 깨워서 봉사와 동원 대상이 아닌 교회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 가능할까요? 사랑의교회가 사랑의교회답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앞으로 지으려는 하트 센터는 남을 수 있지만 사랑의교회는 없다는 겁니다.
한운석 2010-02-11 오후 1:25:53 삭제
사랑의 교회는 초대형교회 중 유일하게 건강한교회로 평가받던 교회이고 희망이었습니다.
명x교회, xx중앙교회 등이 초대형 교회건축을 한다고 해도 당연히그럴려니하였었지만
사랑의 교회 마저도 바벨탑을 쌓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10.01.06 조회수 208
사랑의 교회가 2100억원을 들여서 추진하려는 교회건축에 대한
의식있는 기독교인들의 우려가 높습니다.
아래 글들은 그중에사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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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신앙
바벨탑을 짓는 동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높은 건물을 지어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흩어지지 말자였다. 흩어지면 힘이 약해지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숫자를 모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어 버리셨다. 모아서 힘을 결집하고 그 이름을 내려는 이들의 모든 시도를 하나님께서는 무산시키셨다.
흩어지는 것이 교회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여 있으려고 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사랑의교회 관계자들은 주일에 수많은 인파가 이동하고 움직이느라 사고의 위험이 있고 주차 문제가 있다는 점도 거론한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말들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주일 하루의 문제일 뿐이다. 교회의 건물은 대개의 경우 주일 하루를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의 삶은 엿새 동안의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주일 하루를 위한 건물을 짓고 또 짓고 더 크게 더 높게 더 넓게 짓는다. 여기에서 주중의 삶보다 주일 하루의 삶을 더 중히 여기는 사고가 있다. 물론 주중에도 교회 공간이 활용되지만, 또 다른 예배 또 다른 성경 공부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용기 있고 담대하게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주일의 모임인데, 교회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교회로 나오도록 요구한다. 싸움터는 세상인데, 자꾸 교회로 피신하게 하고 교회로 도망치게 한다. 세상에서 무기력할수록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 더 은혜롭고 영원히 그렇게 찬양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그래서 주일이 중심이 된 예배당 건물 확장은 엿새 동안의 삶보다 주일 하루를 더 중히 여기는 사고와 연관된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의 제자이다.
좁아서 건물을 늘리겠다는 데에 교계 여기저기에서 발언하고 포럼이 열리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사랑의교회 교인들이나 관계자들로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건축을 위해 만들어진 홈페이지를 보면 볼수록, 이것은 단지 건물의 확장에 그치지 않고 이제까지 우리네 교회의 목표와 그토록 성행하던 제자 훈련 전체가 결부되어 있는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단지 현 담임목사님께 대한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그렇게 강조하셨고 모두들 큰 인상과 도전을 받았던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 훈련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미 한국 사회 내에서 교회는 그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이다. 다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몸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의교회를 향해 간절히 당부하며 외칠 뿐이다. 부디 흩어지시길. 그렇게 모이려고만 들지 말고 흩어져서 일상으로 들어가시길. 우리네 가난한 이웃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믿음과 기도로 맞붙어 나가시길. 그래서 오늘의 시대를 사는 제자가 무엇인지, 무엇이 헌신된 평신도인지를 보여 주고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는 사랑의교회이기를 간절히 요청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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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건축이 연 판도라 상자
갈리아를 정복한 줄리어스 시저는 기필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는 주사위를 던지며 한판의 도박처럼 자신의 조국 로마를 향해 진격했다. 역사가들은 시저의 도박으로 500여 년 로마 민주 공화정 역사는 종결되고, 독재정치의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고 평가한다. 이로 인한 독재적 전제정치는 기독교사적으로는 네로로 대표되는 초대교회 300여 년간의 엄청난 박해와 죽음의 역사로 이어졌다.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가 루비콘 강을 건너고 있다. 사랑의교회가 주저 없이 행하고 있는 2,100억짜리 도박판은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교회사는 어떤 평가를 할 것인가?
일개 교회의 건축에 대해 너무 거창한 언사를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이 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교회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이는 한국교회 125년 역사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사랑의교회는 크기나 숫자로 볼 때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갱신 운동, 제자 훈련, 기독교 세계관 운동, 개혁적 복음주의 그룹에서는 사랑의교회 스스로나 외부적 평가에 있어서나 가장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현교회가 80년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00억대 건축을 시행한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 광림교회, 금란교회, 영락교회 등 한국을 대표한다는 기라성 같은 교회들의 70, 80년대 수백억대 건축 경쟁을 촉발시켰다. 사실 이런 교회들이 지금 다시 건축을 한다고 해도 놀랄 일도 아니다. 연세중앙교회가 한적한 온수동에 체육관 같은 교회를 지었을 때도, 할렐루야교회가 우주 비행선 같은 800억 건축을 했다고 했을 때도, 아니 명성교회가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형 교회를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러려니 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부흥 운동과 사회 문화적 성장에 맞물려 급성장한 교회들은 이미 2,000년대 들어오면서 시작된 세습을 통해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교권을 거머쥔 특정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수백억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던 충현교회는 99년 세습이라는 판도라를 열었다. 이는 은퇴를 앞두고 고민하던 1세대 목회자들에게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다. 광림교회, 소망교회, CCC 등으로 유행처럼 번져 간 세습은 경향교회, 금란교회, 임마누엘교회 등 크고 작은 교회로 번져 갔고, 이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교회의 세습은 당연한 것 같은 착시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돈과 권력을 가진 대형 교회들이 목회자에 의해 공산주의적인 독재를 행하고, 어느 기업 못지않게 파렴치한 개 교회 성장주의를 지향할 때 모든 대형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자위하며 위안을 삼는 곳이 사랑의 교회였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기치 아래 학생 선교 단체에서 시행하던 제자 훈련을 교회 구역 모임에 접목하고, 80년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실행처로, 부패하고 타락한 교권에 도전하며 교회 갱신 그룹을 이끄는 이 시대 복음적 지성과 개혁적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사랑의교회는 개혁적 복음주의 그룹에 희망이 되었다.
재정적으로 기댈 곳 없는 고만고만한 단체들에게 사랑의교회는 부끄럽지 않게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고, 수많은 활동가와 회원을 양산하는 못자리판이었다. 모두들 동네 작은 교회 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할 때 사랑의교회 다닌다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정체성을 인정받았다. 사랑의교회에 대한 이런 저런 소식은 마치 전설처럼, 신화처럼 회자되었고, 낮음과 비움으로의 향함은 무한한 신뢰와 자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교회가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해 2,100억 원짜리 교회를 건축하는 도박을 감행하면서 "개 교회 문제이니 상관하지 말라, 큰 교회가 큰일을 한다. 강남의 지도층 인사들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공동의회를 시행하면 이런저런 말이 있어 하지 않았다. 95%가 건축 헌금에 동의했으니 95%가 찬성한 것이다." 이런 식의 원칙도, 상식도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니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심지어 오정현 목사는 예배 시간에 건축을 반대하는 글을 쓴 한 청년의 블로그에 대해 백기사 운운하며 사이버 테러를 조장하고, 이를 시행한 성도들에 의해 그 청년은 절필을 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제자 훈련 받은 깨어 있는 평신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는 없고 담임목사의 일방적 추종자들만 있는 것인가? 오정현 목사가 안수집사회 모임에서, 외부에서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 동지들만 믿고 따라와 준다면 개의치 않고 성전 건축을 완성할 것이라고 했다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예배당을 성전 운운한다던가, 건축 헌금을 작정한 날을 할렐루야 주일로 부른다느니, 정말 이 교회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교회 갱신 운동을 이끌던 그 교회가 맞나 싶어 너무나 황당할 따름이다.
사랑의교회는 이제 주사위가 던져졌다고 선언하며 루비콘 강을 건너는 줄리어스 시저와 같이 보란 듯이 건축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있다. 교회사는 사랑의교회 건축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 제자 훈련, 교회 갱신 운동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기록할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따라 제자 훈련하며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고 교회 갱신 운동에 뛰어든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70, 80년대 근본주의적 부흥 운동을 통해 성장한 대형 교회들과 같이 큰 교회 짓고 큰일 하는 것이라는 현실에 직면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앞 다투어 사랑의교회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 크기 경쟁에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 세련된 부흥사가 되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며, 돈과 권력과 명예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중세 교황청이 성베드로성당을 지으며 영광의 신학, 번영의 신학을 설파했던 것에 맞서 십자가의 신학, 고난의 신학, 약함의 신학으로 나아갔던 개혁적 기독교의 역사는 한국에서 사랑의교회 2,100억 원 건축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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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교회
지난번 사랑의교회가 서초고 자리에 비슷한 거금을 들여 건축하려던 계획은 무시할 수 없는 반대에 부딪쳐 무산됩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지난 <디사이플>지 11월 호 기고를 통해 사랑의교회 분립을 언급하면서 "제자 훈련하는 교회가 분수에 지나친 성장의 덧에 걸려 결과적으로 허약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라고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그런 옥한흠 목사님이 왜 이번 건축에는 30년을 일관되게 실천하신 것과 정반대라고 들릴 2,100억의 무리한 건축에 찬성하는 동영상을 올리셨을까요?
서초고 때와는 달리 오정현 목사는 제직들에게 자신을 믿어 달라고만 하고 대다수가 제대로 검토할 겨를도 없는 사이에 계약부터 잔금까지 모두를 보름 정도 안에 급하게 마쳐 버립니다. 그래서 이미 결정된 대출 이자 비용이나 1,200억 토지 비용 덩어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건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제는 이 큰 덩어리를 뱉어 낼 방법이 없기에 고통스럽더라도 삼켜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뱉어 내려다가는 죽게 되는, 즉 교회가 죽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옥한흠 목사님이 동영상에 참여하게 된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들 합니다.
2,100억은 이자만 5%로 잡아도 원금 외에 매년 100억 이상 나오게 되는 금액입니다. 거기에 두 군데 건물 유지 비용을 추가하면 그 2배에 가까운 큰 비용이 헌금에서 사용될 겁니다. 이는 건물 유지 관리를 위해서 돌이킬 수 없이 지출이 계속되는 고정비용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이런 상황에서 감동스런 영혼 사랑의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을까요? 다시 한 영혼을 살리는 제자 훈련의 정신을 살려 낼 수 있을까요? 평신도를 깨워서 봉사와 동원 대상이 아닌 교회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 가능할까요? 사랑의교회가 사랑의교회답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앞으로 지으려는 하트 센터는 남을 수 있지만 사랑의교회는 없다는 겁니다.
한운석 2010-02-11 오후 1:25:53 삭제
사랑의 교회는 초대형교회 중 유일하게 건강한교회로 평가받던 교회이고 희망이었습니다.
명x교회, xx중앙교회 등이 초대형 교회건축을 한다고 해도 당연히그럴려니하였었지만
사랑의 교회 마저도 바벨탑을 쌓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